항목 ID | GC051013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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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秉鉉 |
이칭/별칭 | 자용(子庸),품산(品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전민욱 |
출생 시기/일시 | 1890년 11월 26일 - 김병현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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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단소 | 김병현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연계리 53번지 |
사당|배향지 | 품산정사 -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연계1리 |
성격 | 문인 |
성별 | 남 |
본관 | 영양 |
저술 | 『품산집(品山集)』 |
[정의]
근·현대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김병현(金秉鉉)은 영양 김씨(英陽金氏)로 자는 자용(子庸), 호는 품산(品山)이며, 1890년 11월 26일에 태어났다. 고조는 김보택(金寶宅)이며, 증조는 김성구(金聖九), 조부는 김우성(金宇聲)이다. 아버지는 종사랑(從仕郞) 김재석(金在錫)이며, 어머니는 나주 정씨(羅州丁氏)로 참판(參判) 정주석(丁周奭)의 딸이다. 첫째 부인은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이태일(李泰一)의 딸이며, 슬하에 2남을 두었으니 사자(嗣子)는 김영복(金永福)이며, 둘째 부인 함평 모씨(咸平牟氏)는 모덕언의 딸로 슬하에 아들 김준(金濬)을 두었다.
[활동 사항]
김병현은 어려서부터 여러 아이들과 놀 때 언제나 우두머리가 되었다. 낭산(朗山) 이후(李垕)의 문인이며, 16세에 국사(國事)가 이미 그의 그릇됨을 보고 구학(舊學)은 오늘날에 적정하지 않다 하여 신학(新學)에 투신하였으며,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기물을 갖추고 예를 다스려 반드시 정성을 다해 유감이 없게 하였으며, 삭망에는 반드시 묘소를 살폈다.
상복을 벗은 뒤에도 더욱 세호(世好)에 뜻을 끊고 날마다 아버지의 정자인 원관정(遠觀亭)에서 지내면서 선조의 계책을 잇고 후진 양성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이때 족보를 닦고 세덕(世德)을 살펴 『술선록』을 편찬하고 아버지의 유집을 정리하여 『희암집(希庵集)』을 발간하였으며, 돌을 쪼아 무덤길을 표시하고, 이어 원관정 『창수록(唱酬錄)』을 간행하였다.
1940년에 일제의 그물이 더해지는 것을 보고 김병현은 화산(華山)의 신적동(薪積洞)에 들어가 살면서 자취를 감추고 고기 잡고 나무하면서 집밖의 일에 대해서는 듣지를 않았다.
광복이 되자 매우 기뻐했으나 오히려 정세가 맑아지지 않음을 염려하여 옛 동리인 연계리로 돌아와 문중의 젊은 사람 가운데 공직에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두 사직서를 내고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이듬해 11월 1일 일어난 민주항쟁 때 영천이 그 피해가 가장 심했지만 연계리는 편안하여 사람들은 그의 선견지명에 감복하였다.
또한 신녕현의 향교가 폐함으로 인하여 석전을 드리지 않은 지가 오래였으며, 건국준비위원회에서 석전대제를 금하였으나 김병현은 “관청에서는 비록 금지하지만 나는 반드시 행할 것이니, 훗날의 재앙과 복됨은 내 헤아릴 바가 아니오”라며 여러 집사들과 더불어 석전 지내는 의례를 더욱 경건히 하고, 향중의 유지들을 가려 뽑아 좌석에 벌려 앉히고 정성을 다 하였다.
원관정에는 일찍이 장서 1천여 권이 있었는데, 여러 일족들에게 말하기를, “책이란 공적인 보배이니 가히 오래도록 사사로이 지닐 수는 없습니다”하고는 책을 종중에 들이고 화서정(華棲亭) 뒤편에 붉은 벽돌로 한 칸의 집을 짓고 보관하여 그것으로 전 문중 후생들의 학업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1958년 김병현은 우연히 병에 걸려 본가로 돌아와 자질들과 문중의 젊은이를 불러 집안의 일들을 거듭 깨우쳐 경계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젊어서 거친 기운을 믿고 오래도록 얇은 재주를 의지하면서 경박한 세상 풍조에 빠져 살았다. 다행히 아버지와 스승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지금에 이르렀는데, 지금 칠순에 다다라 죽은 들 무슨 유감이겠는가? 오직 아버지의 사업을 다하지 못하고 스승의 뜻 이음을 다하지 못함이 한일 뿐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능히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힘써야 하리라.”하였으며, 병이 더하자 부녀자들을 물리치고 눈을 감으니 9월 16일이었다.
[학문과 저술]
석판본인 4권 2책의 『품산집(品山集)』이 있다.
[묘소]
김병현의 묘소는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연계리 53번지 산가일부원(山佳日負原) 곤좌(坤坐) 향으로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연계1리에 소요처(逍遙處)인 품산정사(品山精舍)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