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1023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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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法麟 |
이칭/별칭 | 범산(梵山)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영천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조인호 |
출생 시기/일시 | 1899년 8월 23일 - 김법린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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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5년 3월 - 김법린 3·1 만세 운동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 김법린 중국 상하이에서 임시정부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27년 2월 10일 - 김법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아시아민족회’의 위원으로 피선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1월 - 김법린불교잡지 『불교』 학술부 담당 |
활동 시기/일시 | 1929년 봄 - 김법린 조선어편찬회 준비위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 김법린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지부장을 역임, 일제 대항 비밀결사조직 만당 결성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김법린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 |
활동 시기/일시 | 1952년 - 김법린 문교부장관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53년 - 김법린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 취임 |
활동 시기/일시 | 1963년 - 김법린 동국대학교 총장 취임 |
몰년 시기/일시 | 1964년 3월 14일 - 김법린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김법린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출생지 | 김법린 출생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 |
묘소 | 김법린 사망 - 서울 도봉구 도봉산 앞 수유리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본관 | 김녕 |
호 | 범산 |
대표 경력 |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지부장|문교부장관|유네스코한국위원회 위원장|동국대학교 총장 |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영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법린은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부산 범어사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만당 일본지부 결성과 조선어학회사건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김법린(金法麟)의 본관은 김녕(金寧). 호는 범산(梵山)으로, 1899년 지금의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에서 태어났으며 1964년 세상을 떠났다. 김정택(金玎宅)과 의성 김씨(義城金氏) 김악이(金岳伊)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김법린은 불교 승려로서 3·1 만세 운동 때 서울 탑골공원에서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3월 4일 김상헌과 함께 부산 범어사로 내려와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였고, 국내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범어사와 석왕사 등지에 기밀부를 설치하고 정보를 수집하였다.
1920년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의 금릉대학에 입학한 후, 유법장학회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로 유학하여 파리대학교 부설 외국인학교와 파리대학교[소르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1926년 7월 대학원 진학과 동시에 은행에 근무하였다.
1927년 2월 10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세계피압박민족대회가 열리자 대회에 참여하여 ‘아시아민족회’의 위원으로 피선되었고, 대회 기간 중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였다.
1928년 1월 귀국하여 범어사·각황사 등에서 강연하는 한편 불교계 잡지인 『불교』의 학술부를 담당하였고 1929년 봄에는 조선어학회가 주관하는 조선어편찬회의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그 후 일본 고마자와대학으로 유학하여 공부 중이던 1930년 5월 국내에서 만당이 결성되자, 만당 일본지부의 결성을 주도해 조선불교청년총동맹의 동경지부장을 역임한 뒤 1932년 3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38년 말에 만당 조직이 발각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렀으며, 1942년 10월 소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일경에 다시 체포되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1945년 1월 18일 출옥할 때까지 고초를 겪었다.
[묘소]
김법린의 묘소는 서울 도봉구 도봉산 앞 수유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