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005T05046 |
---|---|
한자 | 義新面 斜上마을-特性-湖南 畵壇 |
이칭/별칭 | 비끼내,빗내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사천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원복 |
[호남 화단 -지방에서 중앙으로]
허련의 긴 화맥은 제자와 집안의 대물림으로 오늘에 이른다. 이런 점에서 다른 지역과 구별된다. 남도라는 지역과 조선 말기라는 지리적,시간적 범위를 넘어 20세기 근,현대로 이어진다. 대원군에게서 미방(米舫)이라는 호를 하사받은 김익로(金益魯)[1845~1915]는 소치와 초의에게 그림을 배웠다. 소치의 넷째 아들 허형은 일찍 타계한 형의 호인 미산(米山)을 물려받았다. 그는 화풍은 나름대로의 독자성보다는 부친에 방불해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과 한계를 보이나, 무엇보다도 선배이며 선생의 입장에서 의재와 남농을 배출한 점에 역할이 돋보인다. 아울러 사군자에 능한 호석(湖石) 임삼현(任三鉉)[1874~1948] 등을 들 수 있다.
전통 한국화에 있어 특출한 기량으로 화단에서 점하는 위상 및 후배 양성 등 모든 점에서 단연 두드러진 화가로는 광주 무등산 춘설헌(春雪軒)에서 노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의재 허백련과, 목포에서 활동한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1987]을 들 수 있다. 이들은 20세기 호남 화단의 양대 기둥이다. 허백련은 진도에서 허련의 방계로 태어나 어릴 때 진도에 유배 중이던 무정 정만조에게서 한학을 배웠으며, 1909년 19세 때 그에게서 의재라는 호를 받았다. 1911년 귀양에 풀린 정만조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서화미술원에서 장습업의 제자 조석진을 만나게 된다. 3년 뒤 1914년 귀향해 운림산방에서 허련의 넷째 아들인 허형에게서 그림에 대한 본격적인 수업을 시작한다. 이듬해인 1915년 일본에 가서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서 법학을 전공했다가 2년 뒤인 1917년 그만두고, 일본 남화의 거장 고무로스이운[小室翠雲]의 문하생이 되어 긴 기간은 아니나 일본의 남화를 배우고 1918년 귀국한다. 두 해 뒤 1920년 나이 서른에 목포공회당에서 첫 귀국전을 열었다. 현대 전남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소장되어 있는 1954년 64세에 그린 "일출이작(日出而作)"은 "농경도(農耕圖)"로 지칭되기도 한다. 이 그림은 주제의 측면에서 전통과 시대가 절묘한 조화를 이룬 그림인 점에서도 눈길을 끈다. 일종의 토속미가 보이며 해남 녹우당에 비장된 윤두서의 "경작도"와 통하는 주제인데, 농업교육을 통한 농촌부흥운동에 앞장 선 의재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듯하다.
의재의 동생 목재(木齋) 허행면(許行冕)[1906~1966]은 미산에 이어 형 의재 등을 통해 가전화풍을 익혔다. 1938년 연진회(鍊眞會) 창립 때 정회원으로 참가했고 그 이듬해엔 제18회 조선미술전에 입선했다. 전통성과 여기성이 강한 "다로경권(茶爐經卷)" 같은 선비 주변에 있는 문방구 등 기물과 꽃들을 담은 청공도(淸供圖) 계열도 있으며, 진도 군청과 전라남도 도청 등에서 공직생활을 했으며 의재미술관 소장 "채광(採鑛)"이 보여주듯 한때 광산업을 운영한 그 자신을 반영하듯 현실감각 짙은 사실적인 그림도 남기고 있다. 의재의 제자로 담양 출신 춘헌(春軒) 허규(許圭)[1913~1977], 조카 치련(穉蓮) 허의득(許義得)[1934~1997], 진도 출신으로 "귀향(歸鄕)"으로 제2회 국전에서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했으나 30대 초 요절한 성관(星觀) 허정두(許正斗)[1920년대 중엽~1950년대 후반] 등이 있다.
남동 허건은 미산의 넷째 아들로 부친에게서 학문과 예술의 기본을 익혔다. 1946년 목포에 남화연구원을 개원해, 부친과 마찬가지로 남도를 대표하는 시경(是耕) 박익준(朴益俊)[1910~1993], 청당(靑堂) 김명제(金明濟)[1921~1992],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1926~ ], 백포(白浦) 곽남배(郭楠培)[1929~2004] 등 다수의 제자를 배출했다. 허건의 아우인 임인(林人) 허림(許林)[1917~1942]은 1935년 18세에 조선미술전에 입선했고, 24세에 일본에 유학해 신채색화법을 배워 일본 문선(文選)에 입선하기도 했고 귀국해 뛰어난 조형 감각과 참신한 화풍에 주목을 모았으며 오히려 그림을 일러준 형에게도 거꾸로 영향을 주었으나 아쉽게도 26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20세기 한국 서예계의 대부로 지칭되는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1903~1981]은 진도 출신으로 서예가이며, 문인화가로 현재 진도에 소전미술관이 있다. 그는 활발한 사회활동으로 국회의원 등 정계에도 몸을 담았으나 문화계에 끼친 영향이 보다 두드러진다. 중국의 화법이나 일본의 서도(書道)와 구별해,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 친숙해진 서예(書藝)라는 명칭을 만들었음도 주목된다. 문인화와 전각(篆刻) 그리고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교육자이자였다. 그는 1944년 전쟁 중인 일본에 갔다가 나중에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를 찾아왔고, "불이선란도(不二禪蘭圖)" 등을 소장했던 수장가이며, 감식안(鑑識眼)으로도 이름을 얻고 있다. 갑골문과 고예(古隸)를 익혔고,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6]에게서 예서(隸書)를 배워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했으며, 국문전서로 불리 우는 한글 서체를 창안했다. 여기에는 원곡(原谷) 김기승(金基昇)[1909~2000]과 평보(平步) 서희환(徐喜煥)[1934~1995], 우죽(友竹) 양진니(楊鎭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