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0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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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厲祭 |
영어음역 | yeoje |
영어의미역 | sacrificial rite for disease spirits |
이칭/별칭 | 여지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제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진도읍 사정리 |
집필자 | 나경수 |
성격 | 민간신앙|농경의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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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례시기/일시 | 봄|가을 2회 |
의례장소 | 진도군 진도읍 사정리 |
신당/신체 | 진도군 진도읍 여제당 |
[정의]
전라남도 진도군에서 행해지던 세시의례의 하나.
[개설]
여제(厲祭)는 본래 관에서 모시던 제사였으나 민간에 유포되면서 농경문화와 결합하여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은 세시의례의 하나로, 후손이 없는 귀신들이 농사를 망치지 못하도록 여제단을 만들어 봄에는 가두고 가을에는 풀어주던 제사의식이다.
[연원]
여제는 본래 중국 주나라 때부터 모셔오던 제사로서, 후손이 없는 귀신을 위해서 모시던 의례였다. 자식이 없이 죽거나 한이 맺혀 죽은 귀신은 여귀가 되며, 이들이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이승에 떠돌면서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친다고 믿는 동양의 고대 민간사고에서 기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전기 태종 때부터 모시기 시작했다. 나라는 물론 모든 군·현까지 여제단 또는 여제당을 마련하여 관에서 주관하여 모셔 오다가, 조선 후기에 성황제와 마찬가지로 민간에서도 모시는 사례가 생겼다. 진도에서는 민간에서 여제를 모시면서 독특한 방법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변천]
진도에서 불리는 여제에 대한 현지음은 ‘여지’였고, 여제단은 ‘여짓단’이라고 하였다. 여제단이라고 불리던 제당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옛 위치는 진도군 진도읍의 북산인 철마산 아래쪽으로, 현 향교 옆에 있었다고 한다.
여제단은 돌담으로 둘려 있었다. 기와지붕에 한 평 남짓한 크기였는데, 사방으로 벽이 있으며, 앞쪽으로 두 쪽문이 있어서 자물쇠로 잠글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다. 제보자들이 어렸을 때는 그곳을 지날 일이 있어도 일부러 피했고, 피치 못해 지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에는 그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여제는 이미 80여 년 전에 없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적인 진행은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에서 주관하였다. 교동리는 서외리·북상리·사정리·송현리 등 4곳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진 곳으로, 옛날에는 전우라고 부르는 이장 한 사람과 4명의 반장이 있었다고 한다. 제사는 일 년에 두 번 지냈다. 봄에는 정월 대보름(음력)에 모셨으며, 가을에는 시월 중 어느 날 모셨던 것으로는 알고 있는데, 정확한 날짜는 전해지지 않는다.
진도군 진도읍 교동리의 중심마을인 사정리에서는 매년 정월 대보름에 거릿제를 지내고 있다. 리사무소 앞에 있는 580여년 된 팽나무가 당산나무이다. 열나흘날 밤부터 새벽까지 거릿제가 모셔지고 나면, 4개 마을에서 뽑힌 제관들이 제물을 갖추어 여제단에 오른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그 뒤를 따르며, 농악기를 울리면서 마치 토끼몰이를 할 때처럼 우~우~ 하는 함성과 함께 귀신을 몰고 여제단까지 이르게 된다. 사람들이 포위망을 좁혀 귀신을 몰아 여제단에 이르면 함성이 절정에 달하는데, 이때 제관들이 여제단 앞에 제상을 차린다. 제보자가 어렸을 때 일이기 때문에 구체적인 절차는 잘 모르고 있지만, 축문을 읽는 독축소리는 들을 만하였다고 한다.
제사가 다 끝나면 누군지는 확실치 않으나 “무작위!” 하고 소리를 지르면,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따라 “무작위!” 하면서 엎드려 절을 하고, 이내 여제단의 문을 걸어 잠그면 귀신들은 그 속에 갇히게 된다고 한다. 무작위라는 것은 자식이 없이 죽은 사람을 지칭하는 무자위(無子位)의 와전으로 보인다. 이것이 진도에 떠도는 모든 귀신들을 여제단 속에 가두는 것으로 구전되고 있고, 특히 무자위라는 말이 뜻하듯,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은 귀신에 대한 기피 관념이 짙게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보름에 거릿제의 일환으로 행해지던 여제가 제보자들에게는 농사철에 즈음하여 해를 끼칠까 하여 귀신을 잡아 가두던 것으로 믿어지고 있고, 이러한 사실은 현재 40, 50대의 동민들에게까지 구전으로 내려온다.
다시 10월이 되면, 어느 날인지는 기억할 수 없지만 다시 제관들이 모여 여제를 지냈다고 한다. 이때는 잡아 가두었던 귀신들을 농사가 다 끝났기 때문에 돌아다니면서 얻어먹으라고 풀어주는 의례였다고 한다. 여제단은 일종의 ‘귀신을 잡아 가두는 감옥’이었던 셈이다.
[의의와 평가]
진도의 여제는 두 가지 측면에서 민간신앙적인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귀신을 일정 기간 가두어둔다는 점에서 독특한 감금형 축귀법이며, 다른 하나는 관에서 주관하던 제례가 민간화되면서 농경의례의 일환으로 변환되었다는 것이다.
정월 대보름에 여제단에 잡귀를 몰고 가서 감금해버리면 농사가 다 끝나고 나서야 풀어준다. 현재로서는 풀어준 정확한 일자를 알 수 없지만, 농사가 끝난 음력 시월에 그런 행사가 있었다는 사실만 전할 뿐이다. 관에서는 청명에 여제를 모셨으나 민간에서 모시게 되면서 정월 대보름으로 옮겨지고, 또한 농사철과 관련지어 감금하고 풀어주게 되었다.
본래 중국에서 발달한 여제에서는 농경과의 상관성을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조선시대에 지내던 여제 역시 전염병 등이 들게 하는 여역(厲疫)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나라 안에 크게 전염병이 창궐할 때 여제를 따로 모시곤 하였던 사례가 그것이다.
그런데 진도의 여제는 농사가 시작되면서 여귀를 가두고, 끝나면 풀어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하나의 농경의례로 성격 전환을 하고 있다. 말하자면 여제의 목적 자체가 바뀌어버린 것이다. 시기적으로 보아도 청명에서 기풍행사(祈豊行事)가 집중된 정월 대보름으로 제사를 모시는 날까지 옮겼다.
진도 여제가 농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정월 대보름을 제삿날 또는 감금의 시기로 정한 데서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런데 이와 함께 생각해보아야 할 사실은 하고 많은 귀신 중 자식을 낳지 못한 무자귀(無子鬼)가 그 대표로 불린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가장 무서운 귀신은 처녀귀신이고 그 다음이 총각귀신이다. 이들은 물론 무자귀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도 자식이 없이 죽은 귀신도 있을 수 있다. 무자귀란 단지 처녀귀신·총각귀신만을 뜻하는 말이 아니며, 후손이 없어서 제사를 받지 못하는 귀신 모두를 가리킨다.
우리 사회에서 자식이 없어 제사를 받아먹지 못한다는 것은 이유 여하를 불문하고 극단적으로 기피되던 것이 사실이다. 양자를 들여서라도 대를 잇게 하려던 전통이 강한 것도 바로 이런 의식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이 없이 죽은 귀신이 가장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여제단에 감금시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무섭다는 것과 농경이 직접 연계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 때 무자귀와 농경이 관련되어질 수 있는 방향에서 양자의 공통분모가 찾아져야 할 것이다.
농경도 생산이요, 자식을 낳는 것도 생산이다. 옛날엔 자식을 많이 가진 여자가 모내기철이면 비싼 값으로 남의 집에 품을 팔았다. 이런 풍속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임신이나 성행위 등이 농경과 상관되는 예는 거의 세계적으로 분포해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아프리카에서는 임신부가 파종을 해야 풍년이 든다고 믿었고,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는石女가 남편의 농토를 망친다며 쫓아냈다. 또 자바지역에서는 벼가 배동할 시기에 주인 부부가 논에 나가 격정적인 성행위를 하면 풍년이 든다고 믿어 행해지던 유감주유감주술적인술적인 풍습도 있다.
진도의 여제에서 농사가 시작될 때 무자귀를 가두는 것은 농경기에 그들이 활동함으로써 생산활동을 방해할까 함이요, 농사가 끝나고 나서 풀어 준다는 것은 그들이 더 이상 방해할 요소가 없어진 다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도의 여제가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가 많이 열리는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것은 농경문화의 영향 때문이며, 무자귀를 선택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