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501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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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天道敎 |
영어음역 | Cheondogyo |
영어의미역 | Religion of the Heavenly Way |
이칭/별칭 | 동학 |
분야 | 종교/신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전라남도 진도군 |
집필자 | 정명철 |
[정의]
1860년 최제우가 창도한 동학을 3세 교주인 손병희가 1905년에 개칭한 종교.
[개설]
동학(東學)은 1860년 최제우(崔濟愚)[1824~1864]에 의해 창도된 신흥종교로 서학(西學)에 대칭하는 이름이다. 당시의 정세는 어린 헌종이 즉위하여 정권다툼이 극에 달했고 유교와 불교는 부패하여 백성을 구제할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일본을 비롯한 외세의 간섭으로 국운이 위기에 처해 있는 가운데 새로 들어온 서학(천주교)이 날로 팽창하고 있었다.
최제우는 민족주체성과 도덕관을 바로 세우고 국권을 다스릴 구도의 수련을 거쳐 동학이라는 대도(大道)를 얻었다. 동학의 기본은 풍수사상과 유, 불, 선 교리를 토대로 한 인내천(人乃天) 사상이다.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지상천국이념과 만민평등 이상으로 포교시작 3~4년 사이에 동학은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지방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동학을 서학과 마찬가지로 백성을 현혹시키는 사교로 몰아세웠고 1863년 최제우는 대구에서 사형을 받고 순교했다.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태백산과 소백산에 숨어서 동학교세를 확장 정비해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의 주체가 되었으나 그 또한 사형을 당하고 만다. 손병희(孫秉熙)가 3대 교주를 맡아 천도교(天道敎)로 이름을 바꾸고 교세확장에 힘쓰게 되었다.
3·1운동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손병희의 동의를 얻어 천도교계의 이름으로 추진되다가 전체 민족의 힘을 집결하고자 기독교, 불교계와 함께 추진한 것이다. 처음부터 반외세를 주창한 동학은 지속적으로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항거했다.
[변천]
동학이 진도에 들어온 것은 1892년 1월, 나주접사 나치현(羅致炫)에 의해서였다. 그는 의신면 만길리 ‘자라머리마을’에 와서 포덕(포덕)하였고 나봉익(羅奉益), 양순달(梁順達)이 입도하면서 진도에 뿌리를 내렸다.
진도 동학도의 활동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1893년 보은과 원평에서 열린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 때는 무안, 해남, 진도 동학도들도 상당수 참여했다고 보여진다. 관원의 보고에 의하면 4월 3일 보은 장내리에서 영암접 40여 명, 무안접 80여 명이 돌아갔다고 한다. 3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돌아간 수는 관읍은 알 수 없으나 전라도만 5,600명이라고 한다. 「진도종리원연혁」에는 나봉익, 양순달, 이문규(李文규), 허영재(許映才)가 이 집회에 참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1894년 3월 21일 백산에서 동학혁명의 깃발이 올라가자 무안, 해남, 진도 동학군들은 4월 중순부터 기포하기 시작했다. 전봉준 장군과 손화중 대접주가 무장 동음치면 당산에 모였을 때인 1894년 3월 15일경 무안의 배인규와 해남의 김춘두 등이 측근들을 이끌고 참가했을 것이다. 4월 16일 전봉준 장군이 함평을 점령하고 5일간 체류했을 때에는 무안과 해남의 동학군들이 대대적으로 기포하기에 이른다. 이 때 진도의 동학도가 합류했을 가능성이 크다.
동학과 관련한 진도의 대표적 인물로는 나치현의 영향을 받은 나봉익, 양순달, 김광윤, 이문규, 허영재 외에 김중야(金仲也), 김수종(金秀宗), 손행권(孫行權), 박중진(朴仲辰), 이방현(李方鉉), 김윤선(金允善), 주영백(朱永白), 김대욱(金大旭), 서기택(徐奇宅) 등이 있다.
동학이 혁명운동으로 맨 처음 진도에 들어온 경위는 박중진에 의해서였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금년 7월에 본부 조도면 적괴 박중진이 영광과 무주 등지에서 무리를 모아 배를 타고 내침, 성을 공략하고 살해하고 재물을 노략질하였으며 군기도 약탈하고 마을에 계속 머물면서 불을 지르고 가산을 부수며 백성의 재물을 겁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