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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00
한자 丙子胡亂
이칭/별칭 병정노란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덕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636년 12월 - 병자호란 발생
전개 시기/일시 1637년 1월 11일연표보기 - 화순 지역 조수성 의병군 남한산성 출정
종결 시기/일시 1637년 1월 - 병자호란 종결
전개 시기/일시 1637년 2월 15일연표보기 - 화순 지역 조수성 의병군 해산
발생|시작 장소 조선 - 조선
종결 장소 삼전도 - 서울 송파구 삼전동
성격 전쟁
관련 인물/단체 조수성|조엽|최명해|임시태|이흥발|이기발|김시엽

[정의]

1636년 청(淸)이 조선에 2차 침입하여 발생한 전쟁.

[개설]

병자호란은 병자년에 일어나 정축년에 끝났기 때문에 병정노란(丙丁虜亂)이라 부르기도 한다. 1636년(인조 14) 청이 조선에 2차 침입하여 발생한 전쟁으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대항하였다. 화순에서도 조수성(曺守誠)[1570~1644]을 비롯한 의병들이 출전하였으나 화친이 이루어져 해산하였다.

[역사적 배경]

1627년 후금(後金)이 조선을 1차 침입[정묘호란]하고 형제의 맹약이 이루어졌다. 이후 조선은 중강(中江)과 회령(會寧)에서 무역으로 예물과 생활필수품을 공급해 주었는데, 후금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君臣)의 의(義)’로 변경하자고 할 뿐 아니라 황금과 백금 1만 냥, 전마 3,000필 등을 요구하였다. 이에 이르러 조선에서는 후금과의 화의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격증하였다. 1636년 용골대(龍骨大) 등 후금의 사신이 조선 조정의 이러한 분위기를 알게 되었고, 후금은 청으로 이름을 고친 후 조선을 재차 침입하였다.

[경과]

1636년(인조 14) 12월 청 태종은 조선의 맹약 위배를 명목으로 삼아 10만의 대군을 직접 이끌고 침입하여 왔다. 조정에서는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검찰사로 임명하여 청의 군사를 막도록 하고 종묘 사직의 신주와 비빈·원손·봉림 대군 등을 강화도로 피난시켰다. 또한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대항하였다. 그러나 군량이 부족하고 군사들의 사기도 떨어져 있던 중 완전히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화순 지역에서는 진사 조수성(曺守誠)[1570~?]이 조카 조엽(曺熀)[1600~1665]과 최명해(崔鳴海)·임시태(林時泰) 등과 더불어 창의하였다. 격문을 돌려 군량을 모으고 화순현 객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훈련을 실시하였으며, 1637년(인조 15) 1월 11일 500여 명의 의병군으로 출정하였다. 이들은 여산에서 양만용(梁曼容)[1598~1651], 옥과 현감 이흥발(李興浡)[1600~1673]·이기발(李起浡)[1602~1662] 형제 등의 의병과 합류하여 남한산성으로 향하였다. 도중에 왕이 청과 화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해산하였다. 1637년(인조 15) 1월 2일부터 화의 교섭을 하다 1월 22일 강화의 함락 소식을 접한 인조가 1월 30일 삼전도에서 신하의 예로 항복하였던 것이다. 결국 소현 세자봉림 대군이 청의 인질이 되면서 병자호란은 종결되었다.

[결과]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은 청에 복종을 강요받았으며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조선 국왕’으로 책봉되어야 했다. 청군에 납치된 수많은 조선인의 속환이 문제가 되었고, 살아 돌아온 이들에 대한 냉대 또한 문제가 되었다. 조정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순절한 선비와 절개를 지킨 부녀자들을 위해 벼슬을 추증하거나 정문(旌門)을 내렸다. 화순 지역에서도 병자호란과 관련하여 포상이 이루어졌다. 조수성김반(金槃)[1580~1640]이 헌릉 참봉에 천거하고, 민정중(閔鼎重)[1628~1692]이 포상을 건의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또한 김시엽(金時燁)의 충의를 기리는 충신각전라남도 화순군 이양면 쌍봉리에 세워졌다.

[의의와 평가]

병자호란 당시 화순 지역 의병들은 직접 전투를 수행하지는 못하였으나 국난을 맞이하여 절의를 내세워 거병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 높게 평가를 받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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