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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15
한자 農民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광철

[정의]

1920년대 전라남도 화순 지역에서 농민 계층이 정치적·경제적 생활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벌인 운동.

[화순 농민 운동의 개설]

1920년대 화순 지역은 전라남도에서도 유난히 소작농의 비율이 높은 곳이었다. 따라서 1920년대 초반만 해도 화순군의 농민 문제는 지역 청년회와 지주층의 시혜적 관심 대상이었을 뿐이다. 1925년을 전후로 사회주의 청년들의 영향을 받아 점차 농민 운동 단체가 조직되었다. 농민 운동은 특히 능주면과 화순면 지역에서 활발하였고, 동복면에서는 거의 활동이 없어 지역차가 심했다. 화순 지역의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탄압이 강화된 1920년대 말에 쇠퇴하였다.

[농민 운동의 배경]

1920년대 화순 지역에는 1만 7000여 농가가 있었다. 이중 소작 겸 자작농은 30%, 순수 소작농은 60%를 차지하였다. 당시 전라남도의 평균적인 상황과 비교 했을 때 소작 겸 자작농은 비슷한 수준이었지만, 순수 소작농의 비중은 무려 2배에 달했다. 화순 지역의 소작 관계는 단순히 소작농의 비중이 높은데 그치지 않고 매우 척박했다. 소작료는 수확량의 50% 이상인 고율이 많았고 자연 재해 등에 따른 손실도 소작농이 전부 부담했으며 지세(地稅)와 각종 공과금도 소작농이 전부 감당했다. 지주에 의한 소작권의 변동도 잦았다.

화순 지역 소작농의 처우는 인근 나주 지역과 광주 지역에 비해서도 열악했다고 하는데 이는 화순 지역에 부재지주가 많았던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화순 지역은 전라남도 지역에서도 소작 분쟁이 잦은 지역 중 하나로 알려져 있었다.

[농민 문제에 대한 초기의 관심]

기록에 남아 있는 최초의 화순군 농민 단체는 화순 소작인 상조회로 1923년 1월에 창립되었다. 앞서 1922년에 전국 단위의 조선 소작인 상조회가 출범하였고 각 지역에 지회 설립을 전개한 사실이 있는데, 화순 소작인 상조회도 이러한 분위기에서 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화순 소작인 상조회는 명칭과 달리 화순 지역 지주와 유력자들이 임원을 구성하는 등 소작인의 권익 신장을 위한 단체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무렵 화순 지역에는 화순 청년회·능주 청년회·동복 청년회가 활동하고 있었고 세 단체 모두 농민의 경제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성향의 회원들이 청년회의 운영을 주도하기 전까지는 농민이나 그 자녀들에 대한 야학을 실시하는 정도의 관심을 보이는 수준이었다.

[농민 운동의 조직화]

농민 운동은 1924년 1월 능주 지역의 사회주의 청년들이 능주 노농회를 결성하면서 본격화되었다. 능주 노농회 결성을 계기로 이후 화순군에서는 1925년 능주 노농 청년회·1926년 화순 농민 조합·1926년 외남 농민회·1927년 춘양 농민 조합·1927년 능주 소작권 피박탈자 동맹·1928년 외남 농민 조합·1929년 능주 농민 조합 등의 단체가 결성되었다.

[능주 지역의 농민 운동]

능주 지역에서 농민 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한 능주 노동회는 1925년 2월 강연회, 8월에는 능주 일원의 각 면을 순회하는 강연회 개최 등으로 농민들과의 접촉 기회를 넓혀나갔다. 이듬해 4월 노농회는 자진 해체하고 대신에 농민 운동을 전담할 능주 농민회를 발족했다.

능주 농민회는 1927년 7월 가뭄 때 관개용수를 둘러싼 지주와의 갈등 문제에 개입하였고, 10월에는 부당한 소작료 징수를 요구하는 일본인 부재지주에 대한 성토대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1927년 광주에 거주하는 한 지주의 무단 소작권 박탈에 대항하는 능주 소작권 피박탈자 동맹의 결성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능주 농민회는 1929년 4월 능주 농민 조합으로 개편했으나 조합 개편 이후부터 경찰의 본격적인 탄압을 받아 활동이 위축되기 시작했고 이듬해까지 이루어진 조합 간부들에 대한 지속적인 체포와 감금으로 결국 활동을 중단하였다. 그 밖에 능주 지역에 속하는 춘양면에도 1927년 12월에 춘양 농민 조합이 설립되었다고 하나 능주 농민회와 같은 활동상은 보여주지 못했다.

[화순 지역의 농민 운동]

화순면 일원에서는 1920년대 중반까지도 농민 문제에 대한 관심이 거의 화순 청년회의 사회주의 청년들에 국한되었다. 이후 1926년 9월에 화순 농민 조합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화순면의 왕성한 청년 운동의 활동에 비해 농민 운동은 별다른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동복 지역의 농민 운동]

동복면 일원의 농민 운동은 화순 지역에서 가장 빈약했다. 동복면 지역은 청년회 활동도 처음부터 보수성을 다분히 드러냈던 곳으로, 이후 농민 운동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였다. 다만 동복 지역에 속했음에도 예외적인 곳이 외남면[현 전라남도 화순군 남면의 일부]이다. 외남면에는 1925년 청년회가 결성되었고 이듬해 10월에는 외남 농민회가 결성되는 등 동복 지역에서도 예외적으로 사회주의 성향의 농민 운동이 활발하였다. 그러나 1928년부터는 경찰의 잦은 간섭과 탄압을 받아 이후 이렇다 할 성과를 보여 주지 못하였다.

[농민 운동의 평가]

일제 강점기 화순 지역의 농민 운동은 1920년대 전반기에는 청년 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1920년대 중반기부터 청년 운동과 다소 성격을 달리하는 본격적인 농민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농민 운동의 주된 관심사는 소작 분쟁이었으나 운동의 상당한 부분은 야학과 강연회 등 식민지 상황에 대한 인식을 넓히는 분야가 차지했다. 이는 농민 운동이 시종 사회주의 청년들의 영향 아래서 전개된 것에 따른 현상이었다. 그러나 청년 운동이 활발한 지역에서 농민 운동도 보다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양자의 관계는 밀접한 상관성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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