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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00528
한자 三一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광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 장소 갱무산 만세 운동 - 전라남도 화순군 화순면 연양리 지도보기
발생 장소 능주 장터 만세 운동 -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관영리 지도보기
발생 장소 동복 장터 만세 운동 -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천변리 지도보기

[정의]

1919년 3월 전라남도 화순 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 운동.

[시대적 배경]

1910년 이후 화순 지역에서는 일본 제국의 식민 지배에 대한 불만이 크게 고조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직후부터 1918년까지 실시된 토지 조사 사업은 농민들의 입장에서는 관행적으로 인정되었던 경작권을 부정당하고 토지를 강탈당해야 하는 현실을 의미했다.

1918~1919년 사이 화순 지역의 민심은 토지 조사 사업 이외에도 몇 가지 이유로 인해 흉흉했다. 1918년에는 이른바 스페인 독감이 화순 지역에도 유행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또한 1919년 1월에는 고종의 죽음이 알려지며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 있었다.

[화순 지역의 상황]

전라남도에서의 3·1 운동은 목포·광주 등 주요 도시에서는 3월 초순, 오지에서는 4월 중에 발생했다. 광주 지역과 인접한 화순군에서는 비교적 이른 3월 초순에 만세 운동이 전개되었다.

화순군에는 당시 만세 운동의 동력이 될 학교가 일본인 소학교 1곳을 제외하면 4곳에 불과했고 시대 상황을 인지하고 행동에 옮길 만한 고학년은 불과 수십 명 정도였다. 또한 비싼 학비 때문에 학생들은 중농층 자녀들이 많았다. 중농층 자녀들은 집에서 통학을 했기 때문에 만세 운동이 전해질 무렵에 가족들의 통제와 주의를 받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몇몇 주목할 만한 만세 운동이 화순 지역 전역에서 발생하였다.

[갱무산 만세 운동]

화순군 화순면 연양리[현 화순군 화순읍 연양리]에서는 3월 15일 마을의 서당에서 공부하던 조국현의 주도로 수 명이 인근 갱무산에 올라가 만세를 외쳤다. 갱무산은 화순면 남쪽에 위치한 얕은 야산이었다. 시위자들은 만세 선창 직후에 일본 헌병이 출동하는 것을 보고 현장을 떠났으나 일부는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능주 장터의 만세 운동]

화순군 능주면에서는 광주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관양리에 거주하던 양회준이 김정렬·주재영 등과 함께 3월 13일에 능주 장터에서 만세를 외쳤다. 양회준 등 당시 만세 운동 참가자들은 평소 장터에서 장사를 하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양회준은 능주 장터 만세 운동으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으며 출감 직후에 사망했다.

[동복 장터의 만세 운동]

화순군 동복면에서는 동복 보통학교 학생인 오재인 등이 3월 20일 같은 면 천변리에 있는 동복 장터에서 시위를 벌였다. 당시 장터에는 고종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뜻에서 백립(白笠)을 쓰고 흰 도포를 입은 노인들이 있었는데 노인들이 학생들의 시위에 동참했고 장터 주변의 몇몇 아낙네들도 참가했다고 전한다. 또한 동복면에서는 기독교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만세 운동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를 입증할 만한 자료가 아직은 부족한 상태이다.

[그 밖의 만세 운동]

3월 15일을 전후로 화순군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는데 특히 당시 한천면춘양면, 청풍면에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야간에 횃불을 피워 올리는 시위가 있었다. 4월 초에도 화순면 소재지에서 천재천의 주도로 촉발된 만세 운동이 다른 군으로 확산되었다고 한다.

[지역 밖에서의 만세 운동]

비교적 잘 알려진 화순 지역 출신의 3·1 운동 참여자로는 정광호양한묵이 있다. 정광호3·1 운동에 앞서 일본에서 체류하던 조선인 유학생들이 추진한 2·8 독립 선언에 참여하다가 중도에 광주로 돌아와 2·8 독립 선언의 취지를 알리는 역할을 했다. 양한묵은 서울의 독립 선언서 발표에 참여했던 민족 대표 33명 중 한 사람이었다. 양한묵은 오랫동안 천도교에서 활동했던 경력을 지녔던 까닭에 손병희 등과 함께 천도교를 대표해 독립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밖에도 화순군 출신으로 지역 밖에서 활동한 사례로는 광주 지역의 만세 운동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동복면 출신의 주형옥과 이양면 출신의 주장암은 광주 지역의 숭일 학교 학생으로, 남면 출신의 김금석은 광주 지역 소재 제중 병원의 간호사로 광주 지역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 동면 출신의 박창규 역시 광주 지역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과 화순 지역의 만세 운동 사이에 어떤 뚜렷한 연계성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평가]

화순 지역의 3·1 운동은 분산적이고 참가 규모도 작았으며 특별한 주도 세력이나 조직화의 흔적이 없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은 없으나 운동을 이끌 천도교와 기독교의 교세가 상대적으로 미약했고, 유생들도 불과 10여 년 전에 겪었던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 운동으로 입은 피해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터라 3·1 운동을 주도할 역량이 부족했다고 여겨진다.

또한 화순 지역에 있던 학교는 화순 보통 학교·능주 보통 학교·동복 보통 학교·이양 보통 학교 등 4개 학교뿐이고 학생 수도 적어 학생들의 집단행동을 유도할 만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는 점도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분적으로는 화순 지역의 운동 역량이 인근 큰 도회지인 광주의 만세 운동에 흡수되어 상대적으로 소규모에 그쳤다고 볼 수도 있다. 운동의 격렬함이 크지 않는 반면에 횃불 시위와 산 위에서의 만세 시위 등은 빈번하게 일어난 편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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