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A0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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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二西川-形局-野沙- |
분야 | 지리/인문 지리,지리/자연 지리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전경숙 |
근대/개항기 | 1897년 여름 - 1897년 큰 홍수로 지금의 마을 앞 물길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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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현대 | 1971년 - 1968년부터 1970년에 광주시민의 상수도원이 된 동복댐의 1차공사가 있었다. |
현대/현대 | 2002년 - 이서천[영신천] 범람을 막기위해 2002년 제방을 건설하였다. |
마을지 | 짐대터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야사 제1교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이서천 제방과 도로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이서천[영신천]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보와들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군도 23호선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옛 이서장터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옛 이서천[영신천] 물길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마을지 | 동복천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
[배 형국의 야사 마을을 번창하게 했던 짐대]
야사 마을은 서쪽 무등산에서 발원한 이서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물길과 어우러진 야사 마을의 터를 보면 배 형국이라고 한다. ‘장수 마을 건강 관리실’에 놓여 있는 「1945년의 야사리 전도」를 보면, 처음 야사 마을이 들어선 아리데미는 이서천 물길을 좇아 자리 잡은 영락없는 배 형국이다. 이 그림 지도는 1999년에 하장호 씨의 옛 기억을 옮긴 것이다. 하장호 씨는 전직 농협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여 지금은 광주에 거주하고 있다. 지도는 1945년 당시의 마을 상황을 생생히 보여주는 채색 그림 지도이다. 주재소, 면사무소, 학교뿐만 아니라, 가가호호에 거주하는 마을 사람들 이름까지 적어 놓았다. 지도 왼쪽 아래 공간에는 1945년과 1999년 사이에 바뀐 주택 거주자 변동 사항까지 기록하고 있다. 지도에는 현재의 군도 23호선과 그 남쪽의 마을 안 길 옆으로도 두 줄기 작은 하천이 흐르고 있다. 지금은 도로 옆 배수로가 옛 물길의 흔적을 보여준다.
배 형국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이나 도읍 터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살만한 터는 산과 물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배는 사람과 물자를 가득 싣고 있으니, 배 형국의 풍수는 사람과 재화가 모여들어서 번창하는 터라고 한다. 물가는 물산이 풍부하고, 다른 지역과의 연결도 좋으니 인근의 중심지가 되기 마련이다.
배 형국에서는 배가 순조롭게 잘 나가기 위해 돛대가 필요하다. 예전에 야사 마을에서는 매년 2월에 장대 위에 나무오리 2개를 올려놓았다고 한다. 1945년 당시의 야사 마을 지도에도 진뱀이들에 짐대거리가 선명하게 표시 되어있다. 짐대는 마을의 수호 신앙물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배가 순조롭게 잘 나아가도록 하는 돛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배 형국에서는 우물을 파는 것을 금기시 한다. 배에 구멍을 뚫는 형국이니 배가 가라앉게 된다는 것이다. 야사 마을에서도 깊은 우물을 파면 망한다거나 우물을 파는 사람마다 해를 입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의 삶 깊숙이 자리한 이서천 물길]
야사 마을은 배 형국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서천 물길이 마을 사람들의 삶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이서천은 너른 들을 제공해 주었지만, 간혹 큰 홍수가 나면 위협적인 존재가 되기도 한다. 용호 마을과 야사 마을 사이의 구릉에 심하게 부딪친 물길은 마을 앞을 빠른 속도로 내려오게 된다. 너른 보와들녘에 난 물길은 무시한 채 야사제1교 부근을 급하게 치고 나아가게 된다. 사평에서 시집오셨다는 김경례 할머니는 야사 마을 대홍수의 기억을 들려주신다.
“물이 다 차버렸어요. 그래서 지붕을 높이 지었어요. 우리 집 앞으로 큰물이 막 내려왔는데, 요리 그냥, 물이 차서 포돗이(겨우) 올라갔네, 우리 어머니랑…”(김경례)
김경례 할머니 댁이 바로 마을 안쪽 옛 작은 물길 바로 위쪽이다. 그래서 10여 년 전에는 이서천 범람을 막기 위해 주변에 제방을 만들었다. 2~3년 전에는 은행나무 근처에 새로운 제방을 쌓고, 그 위에 도로를 만들었다.
마을 앞 이서천의 큰 물줄기는 정유홍수 때 현재의 물길로 바뀌었다고 한다. 1945년 지도에도 옛 물길로 표시된 것으로 보면 1897년 정유년을 이르는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현재의 이서천 물길 옆 보와들녁 끝자락이 장터가 있던 갱변이다. 과거의 물길은 강변 일대를 마치 여의도 같은 하중도[하천 가운데 섬]로 남긴 채 우데미 쪽으로 흘렀다고 한다. 지금 살아 계시면 90세가 넘는 작고하신 어르신한테 이장님이 들은 이야기라고 한다. 그 분도 마을 어르신들한테 들은 이야기였다고 한다.
“농지 정리할 때도 옛 물길 살리자는 이야기를 했었댔어요.”(이순준)
그래도 이서천 덕에 너른 들이 있으니 큰 물 관리 잘 하며 야사 마을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인근에서는 이름 있는 큰 마을을 일궈냈다.
[동복댐이 생겨갖고 좋은 것은 없지]
이서천의 맑은 물길은 도석리 앞을 지나, 유랑자 김삿갓도 잡아두었다는 절경 적벽의 주인공 동복천으로 합류하게 된다. 그러나 1971년, 1981년, 1985년 3차례에 걸친 동복댐 건설이 야사 마을 사람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동복댐이 겨기 가지고 뭐 좋은 것은 없제, 마을이 분열되고, 안개가 많이 껴서 감나무고 뭐고 유실수는 하나도 안 되지, 비가 오면은 제대로 물이 내려가야 하는데, 조 아래서 막아가지고, 요물이 마을 홍수가 지지. 한 3년 전에 마을로 그냥 물이 달려 들어가지고 침수된 집이 몇 집 있었제. 동복댐이 없었어도 야사는 청정고을이었을 거고.(라정숙) 혜택은 못 보고 피해를 보제.”(하종석)
가까이는 진뱀이들과 도석리 마을을 비롯해 야사 마을 동쪽 마을들이 수몰되면서 야사 마을의 중심 기능이 약해졌다. 안개까지 심하여 유실수 재배도 어렵게 되었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은 댐 건설로 좋은 점은 없고 피해만 본다고 입을 모은다.
[이서천 물이 있어 흥하게 된 하씨 이야기]
야사 마을에는 물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야사 마을 주민의 절반 이상이 하씨인데, 실학자 규남 하백원을 비롯해 주요 인물을 많이 배출하였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하씨가 새우를 뜻하니 물과 잘 어울려 흥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새우의 한자가 하(鰕)이니 진주 하(河)씨와 발음이 같아서 새우라 칭한 것이다. 하씨는 물 수가 들어가니 배 형국과 잘 어울린다는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한 수 위 표현인 듯하다. 진양 하씨는 진양의 행정 명이 진주로 변화되면서, 진주 하씨라고도 한다. 이렇게 야사 마을 사람들은 이서천 물길을 좇아 삶의 터를 잡고, 자연과 호흡하며 800년 전통의 역사를 지켜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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