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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 속에서 실현된 하백원의 학문과 예술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6A020301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마을/마을 이야기
지역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정지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선후기 1841년 - 하백원이 61세 되던 1841년 석성현감으로 부임했다.
조선후기 1842년 - 하백원이 1842년 충남 보령으로 1년 동안 유배되어 생활하였으며 보령지역 유람을 통해 『해유시화첩』을 그렸다.
마을지 규남 박물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164번지
마을지 싸리재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세상의 모든 것이 학문이 아닌 것이 없다.]

야사 마을에 실학을 뿌리내린 하백원은 책 읽는 것은 주체적 사고를 돕고 실제적인 지식을 획득 수단이 되며 그것을 통해 실효와 실용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주체적 책읽기를 강조하였다. 이를 통해 발현된 그의 내면적 자각과 학문적 반성 태도가 실천적 사고와 이어져 오늘날의 그를 있게 하였던 것이다. 하백원은 당시의 주자학적 학문 체계가 왜곡되고 변질되어 모순이 드러나자 유학자로서의 양심으로 학문의 본질과 목적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 방법적 전환을 모색함으로써 실천과 실용의 학문 정신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하백원의 글을 모아 1946년 편찬한 『규남 문집』을 통해 그의 학문적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옛날에 유학자가 되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었으니 학문이 이것이다. 옛날의 이른바 학문이란 반드시 독서만을 가르친 것이 아니었다. 농업, 공업, 상업이 다 학문 아닌 것이 없다. …주자가 “전곡(錢穀)·갑병(甲兵)이 위기지학(爲己之學)이 아님이 없다”고 말한 것은 결국 학문의 유용함을 뜻하지 않는가?”

하백원의 실학은 자연과학, 천문학, 수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전개되었으며 우리나라의 지리적 여건, 수리시설의 낙후, 농사 기술의 후진성 등을 거론하면서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고 식생활의 풍요를 가져다주기 위해 지도에서부터 과학적 생활도구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들을 제작하게 되었다.

[하백원의 실학 정신이 녹아든 발명품]

하백원은 당시 현실의식과 실용적 요구에 관심을 갖고 끊임없는 탐구와 실험 정신으로 실용적 학문을 추구하였다.

하백원은 농사철에 인분이나 퇴비 따위의 거름을 마을 앞 싸리재 너머 밭까지 실어 나르는데 편리하도록 ‘거북이’라는 일종의 수레를 만들어 농사일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밖에도 자명종, 개량아궁이, 술의 양을 적당히 조절하도록 하는 잔인 ‘계영배’, 약탕기에 타이머와 같은 화취(火毳)를 달아 시간 조절이 가능한 ‘약탕로’를 만들어 삶의 곳곳에 편리함을 주고자 하였다.

[예술을 통해 학문적 깨달음을 구하다]

하백원은 그림을 그리는 것도 학문을 하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할 본분이라 여겼으며 그림을 펴놓고 눈으로 집중하여 묵묵히 바라보며 정신을 모으기를 즐겼다. 규남 박물관 전시실에는 하백원이 그린 『해유시화첩』의 그림들, 「포도와 원숭이」, 「묵매화병풍」, 「까치매화도」 등의 그림과 그가 직접 새긴 전각 인장들이 전시되어 있다.

하백원은 이밖에도 여러 회화 작품을 남겼는데 모두 낙관이 없는 것으로 보아 『고씨화보』를 토대로 연습했던 것들로 보이며 문인화의 형식을 띠고 있는 이 그림들은 하백원 자신의 문인적 의취(意趣)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하백원은 유학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들을 학문으로 보았으며 천문, 과학, 지리 등에서부터 예술에 이르기까지 그가 관심을 보였던 많은 분야의 결과물을 남겼다.

[정보제공]

  • •  이영숙(여, 1955년생, 규남 박물관장)
  • •  하상래(남, 1946년생, 규남 하백원선생 후손)
  • •  하성래(남, 1935년생, 규남 하백원선생 후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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