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A03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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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야사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한미옥 |
근대 | 1923년 - 정이님 할머니, 화순군 한천면에서 출생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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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 1930년 - 정이님이 영산포의 남국민학교에 입학하다 |
근대 | 1939년 - 정이님이 야사리 하응초 혼인하여 야사 마을로 들어오다. |
마을지 | 베틀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 160번지 |
마을지 | 야사리 진주하씨 선산 -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영신길14 |
[야사 마을 큰어머니]
야사 마을에서 진양 하씨 집안은 토반으로 마을의 대소사를 주관해서 살아가고 있다. 2012년 현재 마을의 최고령인 정이님 씨는, 열여섯에 야사 마을 진양 하씨 며느리가 되면서부터 평생을 마을의 큰어머니 노릇을 하면서 살아왔다. 큰며느리는 아니지만, 큰집의 여의치 않은 상황 때문에 작은며느리인 자신이 큰며느리 역할을 지금껏 하면서 살아왔지만 큰 불만은 없다고 한다. 할머니는 젊어서부터 마을에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단다. 당시는 다 같이 어려운 살림이었기에 남을 돕기란 쉽지 않았지만, 가난한 살림에 시집가는 처녀가 옷이 없어 쩔쩔매자 할머니는 자신의 옷을 고쳐서 입혀 보낸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남을 위한 삶이 크게 불편한 것은 아니라면서, 오히려 ‘이것도 내 자식들한테 공으로 돌아가겠거니’ 하시면서 웃으셨다.
[나주 영산포에서 ‘데이상’으로 살았던 유년 시절]
“나무 목자 밑에 아들자자가 있는 것이 무엇이냐?”
“예. 이(李) 자입니다.”
1936년 어느 날 영산포의 남 국민학교 교장과 ‘데이상’[鄭: てい, 정이님을 일본식으로 부르는 말]이 마주 앉아서 입학을 위해 간단히 묻고 답하고 있다. 정이님 씨는 1923년 화순군 한천면 금전리에서 출생했지만, 여섯 살 무렵에 아버지가 나주 영산포로 이사하여 건어물 장사를 하게 되면서 시집오기 전까지 살았다. 여덟 살 때 영산포에 있는 남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자 주위 사람들의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당시 남 국민학교는 조선인 자녀들 중 부자고 똑똑한 아이들만 들어가는 곳이었는데, 그곳에 ‘촌가시내 데이상’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한 열네 살부터 열여섯 살 혼인 전까지 일본인 우체국에서 일을 했는데, 시집을 가게 되자 사람들이 몹시 서운해했다고 한다.
[야사리 진양 하씨 집안으로 시집을 오다]
열여섯에 화순군 이서면 야사리의 진양 하씨 집안의 둘째 아들이자 당시 스물 넷의 청년 하응초와 혼인하였다. 혼인하기 이틀 전까지도 정이님 할머니는 자신의 혼인을 알지 못했는데, 혼인 말을 들었을 때 얼마나 서운했던지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란다. 나름대로 영산포에서는 인정을 받는 신여성이었는데, 갑자기 시골로 시집을 가라니 말이다.
시집가던 날, 영산포 처녀 정이님은 도시 처녀답게 택시를 타고 광주까지 갔단다. 그런데 광주에서부터 야사리 야사 마을까지의 길이 워낙 산중이라 결국 가마를 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시집을 온디 질(길)이 없어. 싸리재 질이 요만이나 해갖고. 가매 띠미고(매고) 온디 여기다 콕 찧고 저기다 콕 찧고. 막 그려.”
작고 구비진 산길을 가마로 오자니 어린 신부는 얼마나 멀미가 났을까. 그렇게 시집을 와서 보니 시부모님에 시아재가 네 명이나 있었다. 다행히 시부모님 성품이 좋아서 시집살이는 하지 않았지만, 가난한 살림에 시아재들까지 챙기랴 항상 고단하고 힘이 들었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바느질이고 길쌈이고 배우지 않고 시집을 왔지만, 그래도 눈썰미가 있고 영리해서인지 금방 배워서 가족들 옷도 일일이 베를 짜서 해 입히고, 시아재들도 모두 정이님 할머니가 짠 베로 옷을 해 입고 장가를 갔단다. 베짜는 솜씨가 얼마나 좋던지 이웃 마을까지 가서 베를 짜주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진양 하씨 집안 며느리로 살아온 73년]
진양 하씨 집안의 둘째 며느리로 들어왔지만 시집와서부터 진양 하씨 집안 제사를 모두 정이님 할머니가 지냈다. 일 년이면 제사만 7번에, 시월 보름에 지내는 시앙[시제]까지 그리고 명절 제사까지 보태고 보면 만만치 않은 제사치레지만, 그래도 성가시다고 하지 않고 묵묵히 진양 하씨 며느리로서 살아왔다.
“제사상에는 탕이 그중 크고, 또 나물 세가지. 조구 반찬, 병치, 그러고 편허고, 편은 떡이거든. 떡 옆에 식혜 놓고, 돼아지 고기도 놓고. 소고기는 사다가 그냥 요만치썩 해서 산적을 해서 올려. 그러고 계란도 삶아서 놓고. 그럼, 고로고로 있는 대로 올려. 밤 대추 곶감, 명태도 사다 놓고 홍시도 올려놓고 다. 장만한데로 다 놔. 제사상이 빡빡하제.”
진양 하씨 제사상에는 어떤 것들이 올라가냐고 물으니, 온갖 음식이 다 올라간다고 하시면서도 말 끝에 힘이 들어간다. 그리고 기어이 한마디를 덧붙이신다.
“근디 제사를 모시고 선영을 그렇고 받들인 사람은 밥 먹고 살대.”
2012년에 딱 아흔 살이 되었으니, 지난 73년의 세월 동안 정이님 할머니는 진양 하씨 며느리로 살아왔다. 지금은 함께 살고 있는 큰며느리가 역할을 이어서 하고 있으니 큰 걱정은 없는 셈이다. 다시 태어나도 진양 하씨 며느리로 살겠냐는 조사자의 물음에, 할머니는 웃으면서 한마디 하신다.
“안와. 요렇고 산중인디 오겄어? 일이 많애. 나중에는 도시에 가서 살아보재.”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