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C010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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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옥희 |
현대/현대 | 1950년대 후반 - 도장 교회가 생기기 전 김보순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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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현대 | 1953년 - 김보순이 거제도포로수용소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임 |
현대/현대 | 1959년 11월 - 도장 교회를 신축했다. |
현대/현대 | 1978년 7월 - 도장 교회를 확장신축했다. |
현대/현대 | 2012년 12월 - 김성인이 이세종생가복원추진위원장을 맡음 |
마을지 | 도장 교회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79번지 |
마을지 | 김보순의 집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316번지 |
[성자 이세종을 통해 예수를 믿게 된 도장 마을 사람들]
도장 마을 대밑애 뒷산 자락에 도장 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천태로에서 바라보면 대숲에 쌓여 교회 십자가만 보이지만 대밑애길을 따라 왼쪽으로 오르막길을 오르면 아담하고 소박한 시골 교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2013년에 85세 된 김보순 씨는 도장 교회 초창기부터 참여한 인물로 도장 교회의 내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도장 교회가 생기기 전에도 마을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몇 있었다고 한다.
“그전에 무소속으로 믿는 교인들이 있었어요. 소속도 되도 않고 예수 믿는 노인들이 계셨단 말이여. 옛날부터서. 이 근동에서는 등광리에 살았던 이세종씨가 말하자면 제일 첨에 은혜를 입은 사람이란 말이여.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어. 우리 마을에도 그 사람들 파가 있었다 그말이여.”(김보순)
무소속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란 인근에 있는 도암면 등광리에 살았던 이세종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이세종은 1880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나 일찍 부모를 잃어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해야 했다. 자린고비 정신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아 부자가 된 그는 우연히 성경을 접하고 ‘생명의 말씀’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을 위해 나누어주기 시작하면서 재산욕, 명예욕, 식욕, 색욕, 수면욕도 초월했다. 그는 호남의 대표적 영성가인 이현필과 최홍종, 강순명, 백영흠을 길러낸 인물이다.
도장 마을은 이세종이 살았던 등광리와 멀지 않은 곳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이세종의 부인이 도장 마을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이세종의 부인은 젊었을 적 남편이 금욕을 선언하자 이를 못 견뎌 두 번이나 새 남편을 찾아 집을 나간다. 그때마다 이세종은 ‘일흔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아내를 용서하고 받아들였다. 말년에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남편의 뜻을 따랐던 이세종의 부인은 도장 마을에서 이세종을 따르던 도장 마을 신도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을 마감한다. 과거의 인연이 현재까지 이어진 것인지 도장 마을 주민인 김성인 씨가 등광리에 이세종 생가 복원을 추진하고 있다.
김보순 씨도 도장 교회가 생기기 전에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 등광리의 기도소에 간 적이 있다고 한다. 또한 이세종의 제자들이 세운 도암면 원천리에 있는 동산 교회를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가 도장 마을 교인들의 수가 점차 많아지자 교회를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거그 등광리로 가기도 하고. 우리 마을에 교회가 없을 때는 동산 교회도 갔어. 마을 할머니들도 같이 가고. 어린아이들도 가고. 결국에 우리가 수가 많아지니까 교회가 필요하다 해 갖고 교회가 세워진 거지.”(김보순)
[김보순 씨 집에서 예배를 드리다]
김보순 씨는 6·25 전쟁 당시 의용군으로 전투에 참여했다가 충청북도 단양에서 잡힌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 그 곳에서 미국인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난 후 고향으로 돌아온 김보순 씨는 도장 마을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함께 등광리, 원천리까지 가서 예배를 드린다. 점차 신도수가 많아지자 도장 마을 자체적으로 예배를 드리게 된다. 도장 마을에서 처음 예배를 드린 장소는 바로 김보순 씨 집이었다.
“그전에는 우리 집에서 예배를 드렸거든요. 우리 집에서 기도처로 모이고 밤예배도 주일날 낮에도 여기서 모이게 되고 그때 전기불도 안 들어올 때라놔서 대한등 큰놈 사다가 걸고 석유로 해서 인자 불 쓰고 그렇게 해서 우리 집에서 초창기에 모였거든요. 그것이 기초가 되었어. 그때가 1957년도나 그렇게 됐을 것이요.”(김보순)
1957년경 김보순 씨 집에 모여 등을 걸어놓고 예배를 드렸다. 이때는 미국 브라운 선교사 등이 와서 예배를 인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신도수가 30여명에 이르자 도장 마을에 교회를 건립하기로 의견이 모아진다.
[도장 교회가 마을에 자리잡기까지]
교회를 세우기로 계획은 세웠으나 재정은 열악하고 교회를 지을만한 마땅한 장소가 없어서 애를 먹던 중에 김보순 씨는 형수님 소유의 땅을 기증받아 교회를 지을 부지를 마련한다. 신도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서 그곳에 가건물로 예배당을 지었으나 화순군에서 허가도 없이 건물을 지었다고 철거를 요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 번 지은 교회를 부술 수도 없어서 그대로 둔 것이 시간이 흘러 지금에 이르렀다.
처음 목조 건물 약 53㎡[16평]으로 교회를 세운 때가 1959년 11월이다. 이후 1960년 4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전남 노회로부터 인가를 받았으며 1961년 3월 여전도회 조직을 다시 세우고 5월에는 예배당 지붕을 양철로 바꾼다. 1967년 8월 약 46㎡[14평]의 사택을 신축하고 1971년 5월에는 종각을 건립한다. 1972년 11월에는 사택 지붕을 기와로 개축하고 진입로를 포장하였으며 상수도와 전기를 가설한다. 1978년 7월 약 66㎡[20평]으로 예배당을 신축한다. 1992년 8월 옛 사택을 철거하고 약 66㎡[20평]의 사택을 신축한다.
[도장 마을의 일부, 도장 교회]
예배당 없이 개인집에서 소수가 모여 예배를 드리던 초기의 모습에서 도장 교회가 생긴 이후로 신도수가 많을 때는 8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금은 노인들이 많이 돌아가셔서 20여명이 교회를 다니고 있다. 도장 교회가 생긴 이래 정규금 전도사를 시작으로 여러 사역자들이 거쳐 갔으며 2013년 현재는 오훈교 목사가 시무하고 있다.
도장 교회에서는 특별한 활동보다는 예배드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만 간혹 도시에 있는 교회에서 도장 교회로 수련회를 와서 마을에 봉사활동을 한 적도 있다고 한다. 마을에서 행사가 열릴 때는 도장 교회의 목사님과 사모님을 불러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도장 교회는 긴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도장 마을 사람들에게는 마을의 일부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