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6C0102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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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마을/마을 이야기 |
지역 |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도장리 도장 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옥희 |
조선/조선 전기 | 1446년 - 형군철이 무과에 급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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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 후기 | 1683년 - 어머니 형씨가 죽기전에 세 자녀에게 재산을 나누어준다는 내용의 분재기를 작성하였다. |
조선/조선 후기 | 1642년 - 형승윤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
조선/조선 후기 | 1714년 - 김명옥이 능주목사에게 준호구를 받았다. |
조선/조선 후기 | 1804년 - 김응현 등이 김응상이 딸만 셋을 두고 죽었기 때문에 김응만의 둘째 아들을 양자를 들이고 위토답을 준다는 내용의 완의를 작성하였다. |
개항기 | 1902년 - 형학문이 교지를 받았다. |
[진주 형씨 가문에 전해오는 고문서]
진주 형씨 20대 종손인 형광호 씨 집에는 오랜 역사 속에서 영화로웠던 집안의 과거를 이야기해주는 많은 고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세종 때 형군철(邢君哲) 선대 할아버지가 받았던 교지이다. 형군철은 생원 진시 시험에 합격한 이들에게 내리는 교지인 백패와 과거 급제자에게 내리는 교지인 홍패를 받았다. 형군철은 1446년(세종 28)에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충청도 병마사에 이르렀던 인물로 집안을 크게 빛낸 인물이다.
형군철의 후손인 형용인(邢用仁)과 형자관(邢自寬)이 받은 백패도 보관되어 있다. 형용인은 진사 벼슬을 하였다. 형자관은 조선 성종 때의 인물로 남평현감, 하양현감을 역임했다. 조세를 공정하게 관리하고 형을 신중히 집행했으며 청렴하고 강직한 것으로 이름이 높아 백성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망을 받았으며 이를 인정받아 임금이 특별히 옷을 포상으로 하사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도장 마을에 입향한 형세영의 부친인 형자홍(邢自弘)[1495~?]은 1571년(선조 4)에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사 주부와 벽동 군수를 지냈다. 형세영의 3대손인 형승윤(邢承尹)[1597~?]은 1642년(인조 20) 문과에 급제하였고 화순 현감에 올라 선정을 베풀어 이름이 높이 전하였다. 후손 형수화(邢壽華)[1672~1750]는 통정대부 벼슬을 했고, 후손 형학문(邢學文)[1868~1924]은 가선대부 벼슬을 했다. 형광호 종손은 자라면서 형학문 할아버지가 누린 큰 권세에 대해 전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5대조 할아버지가 권세가 아주 셌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어라우. 물가를 건너가려면 그 분 옷 안 젖게 하려고 사람들이 엎드려 다리를 만들어줬다고 그러대요. 그때 권력을 다 써버렸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형학문 할아버지, 그분이 학식이 매우 좋았어요.” (형광호)
이 집을 지키고 살아가는 형광호 종손과 유흥자 종부는 진주 형씨 집안의 종손으로 살아가는 것에 책임감과 자부심을 느끼지만 예전 같지 않은 종가살림을 지켜가는 것이 쉽지 않다고 한다.
[진주 김씨 가문에 전해오는 고문서]
도장 마을 진주 김씨 종손인 김기화 씨 집에는 350년 가까이 된 분재기, 200여 년 전의 호적단자, 그 외 통문, 완의 등 고문서가 전해지고 있다.
분재기는 전통시대 재산의 상속과 분배에 관한 문서이다. 주로 재산의 주인이 자녀를 비롯한 가족에게 재산을 상속하거나 분배한 문서이다. 김기화 씨 집에 전해지는 1683년 분재기는 형씨 할머니가 세 자녀에게 재산을 상속하여 주는 내용이다. 진주 형씨의 자손으로 재산을 상속받은 진주 형씨 할머니가 진주 김씨와 혼인한 후 자신의 재산을 진주 김씨 자손들에게 나주어 주는 것을 기록한 내용이다. 피난길에 정착한 마을이라 재산을 소유하지 못한 진주 김씨 자손들에게 형씨 할머니가 남긴 재산은 도장 마을에 뿌리를 내리는데 큰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김기화 씨 집에서 보관하고 있는 1804년 작성된 완의에는 진주 김씨 김응삼이 딸만 셋을 두고 죽었기 때문에 김응만의 둘째 아들 인탁을 양자로 들이고 위토답을 준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진주 김씨 집안에서는 진사 벼슬을 한 김재탁[택]처럼 큰 인물이 많이 나왔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서 교지 등은 분실되고 호구단자와 준호구가 주로 남아 있다. 호구단자는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관에서 호구장적(戶口帳籍)을 만들 때 호주가 자기 집의 상황을 적어서 관에 제출한 문서이다. 호주는 일정한 양식에 따라서 작성 당시의 연호 또는 간지(干支), 그 주소와 함께 호주 및 그 처의 4조(四祖), 노비, 동거인의 신분·성명·성별·연령과 호주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 등을 기록한 문서 2통을 관에 제출하였다. 준호구는 호구장적에 의거하여 관에서 등급하는 문서이다. 오늘날의 호적등본과 주민등록등본의 성격을 함께 갖는 문서이다.
진주 김씨 문중에서는 1714년 능주목사가 김명옥(金鳴玉)에게 발급한 준호구를 비롯하여 총 50여 건의 호구단자와 준호구를 보관해오고 있다. 그런데 진주 김씨 후손인 김성인 씨에 의하면 이것 또한 일부분일 뿐이라고 한다.
“문서들이 우리 집에는 많이 없어요. 우리 종가집에 있고. 그래도 나 어렸을 때 우리집에도 책 궤짝이 몇 개 있었어요. 책은 찢어서 연 만들어버리고, 바구니 발라버리고 그랬는데. 그전에 우리집 뒷문에 책이 한 권 걸려있어. 그 책을 내가 고등학교 땐가 본 적이 있는데. 집 뜯을라고 보니까 그때까지도 그대로 있드라고. 『대동운부군옥』이라고 그 책이드라구요. 결혼해가지고 집을 다시 지을라고 보니까 그대로 있더라구요.”(김성인)
진주 김씨 문중의 문서들은 대부분 종가인 김기화 씨 집에 보관되어 있지만 김성인 씨 집에도 고문서와 고문헌이 든 책 궤짝이 여러 개 있었다고 한다. 그 문서와 책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몰랐던 어린 시절, 그것으로 연 만들어 날리고, 바구니도 발랐다고 한다. 다른 집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몇 번의 난리를 몸으로 부딪쳐야 했던 도장 마을 사람들은 6·25 전쟁 때 마을이 불타버리고 한동안 마을을 떠나야 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가난으로 몸서리치는 시간들도 있었다. 그 와중에 선조들이 남겼던 옛 책과 문서들을 지켜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많은 것들이 사라졌지만 남아있는 고문서에는 도장 마을의 역사가 담겨 있다.
[정보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