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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500988
한자 演劇映畵
영어의미역 theater and film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남도 진도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박주언

[정의]

배우가 무대 위에서 대본에 따라 동작과 대사를 통하여 표현하는 예술 형태인 연극과 스크린 상에 움직이는 영상(映像)을 이르는 영화를 총괄적으로 아우르는 말.

[개설]

연극은 삶의 근원적·총체적 경험에 기원을 두고 있어서 다른 어떤 문화적 산물에 못지않게 역사적·지역적·민족적 소산인데 반하여, 영화는 제작과정에 창조적 요소와 기계·기술적 요소, 그리고 경제적 요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재정을 책임지는 제작자와 스튜디오·카메라·녹음·현상 등의 시설이 있어야 하며, 감독·시나리오작가·배우·촬영기사·미술가·음악가·편집자가 공동으로 작업해서 이루어낸다.

이처럼 연극과 영화가 제작되는 과정은 다르지만, 관객과 극장을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인 특성을 지녔다. 특히 극장은 관객과 소통할 수 있게 하는 공간 무대로서 연극과 영화에서 필수불가결하다.

[연극의 변천과 현황]

한국 연극의 역사는 외국에 비해 극히 짧다. 그러나 진도에는 국가무형문화재 제81호인 진도다시래기가 있어 옛날부터 상가(喪家)에서 연행되어온 사실이 주목을 끈다. 진도의 연극은 진도다시래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5년 1월 17일자「시대신문」에 따르면, 1924년 12월에 진도읍에서 20세 이하 청소년들이 허행복(許行福)을 단장으로 지방 순회 극단을 조직하여 지방 청년 단결과 자녀 교육의 필요성을 선전하기 위해 각 면의 마을을 돌며「계모의 악행」이라는 각본으로 순회공연을 했으며 호평을 받아 다른 지방 공연도 예정하였다. 한편, 지산면 가학리 박석치(朴碩緻)·김희만(金熙萬)을 비롯한 청년들은 야학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소인극단(素人劇團)을 조직해 각 마을을 순회공연 하였다. 그 결과 주민들로부터 의연금을 받아 야학회를 세우고 진학이 어려운 아동과 부녀자들을 모집해 보통학교 수준의 공부를 가르칠 수 있었다.

1929년 1월 17일에 발행된「조선일보」에 따르면, 진도청년동맹은 회관 건립을 위해 1928년 11월 초부터 12월 25일까지 전국 순회 극단을 조직하여 1천여 원의 거액을 만들었다. 특히 군내면 세등리곽재술(郭宰述)은 1933년 10월에 고향에 돌아와 야학으로 문맹퇴치 사업을 펴는 한편, 학생들로 구성된 연극반과 함께 조선총독부의 농촌진흥운동을 비판하는 연극「지도자의 강연」을 공연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에는 진도 전역에 반공(反共) 분위기가 휩쓸면서 과거 항일·민족주의적이던 연극 내용은 반공 내용으로 바뀌었다. 진도읍내에서는 한병수(남산리), 임정운(성내리), 김명엽(서외리) 등이 주연급으로 공연을 했다.

이에 앞서 진도 출신의 박보아·박옥진 자매는 서울에 가서 여성 국극계의 스타로 등장했다. 언니 박보아는 연극을 하다가 거문고 명인 한갑득과 결혼하였고, 동생 박옥진은 「단종과 사육신」에서 단종역을 맡아 일약 스타로 명성을 얻었다. 또 진도 출신 양상식(1921년생)은 조선창극단원으로「흥보전」에서 놀보역으로 이름이 났고, 허희(1932년생)는 국립창극단의 단원으로 희극 연기가 두드러졌다.

‘나이롱 극장’으로 알려진 이동 창극단은 창극, 판소리, 민요 등과 줄타기나 만담 같은 내용을 가지고 여러 곳을 순회공연하며 약품·건강식품·생활용품 등을 판매하였는데, 진도 출신으로 진도다시래기 예능보유자 강준섭을 내세울 수 있다. 강준섭은 17세 때부터 이동 창극단의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8세에 역시 단원인 경상도 출신 김애선을 만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이롱극장은 2005년에도 지산면 인지리에서 영업을 했고, 강준섭 부부는 요즘도 계약만 되면 공연을 떠난다.

2002년 진도군 예산 지원으로 막을 올린「진도에 또 하나 고려 있었네」는 전 출연진이 진도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마찬가지로 2006년「바람의 상처」는 간첩 사건으로 18년간 억울한 세월을 보낸 박동운의 처지를 묘사한 연극으로서 진도 사람들의 연기력을 잘 보여주었다.

[영화의 변천과 현황]

진도에서의 영화는 조선일보사가 ‘독자위안 활동사진대회’의 일환으로 1929년 1월 15일부터 4일간 「먼동이 틀 때」와 「장한몽」 2편을 상영한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1948년에 제주도에서 영화 사업을 하던 북한 출신의 김순천이 진도군 진도읍 성내리로 와서 땅을 임차하여 흙벽 양철 지붕의 진도극장을 세우고 16㎜미제 RCA영사기로 상영을 시작했다. 극장에서는 외지의 창극단이나 진도초등학교의 연극반 발표회도 가졌다. 진도극장은 6·25전쟁으로 한동안 쉬었는데 김순천의 장남 김일원이 진도 출신의 여자와 결혼하여 진도극장 운영을 맡았다가 김씨 일가가 서울로 떠났다.

진도극장이 없어진 뒤 서예가 손재형 소유의 목포극장에서 기사로 있던 박상용의 형 박재용이 16㎜ 영사기 1대를 가지고 종사원 5명과 함께 진도로 왔다. 박재용이 진도읍 북상리 박종민을 만나면서 이동 가설극장이 시작되었다.

한국 영화와의 상영 비율이 1/3이던 외국 영화는 목포 사람 채봉이가 해설을 맡았고, 채봉이는 변사라 불렸다. 채봉이는 오후에 영화 줄거리를 설명하면서 군강공원 동편과 서편에서 진도읍 주민들에게 ‘오늘밤 구경하시라’며 선전했다. 그러나 2년 7개월 만에 사업 부진으로 박재용은 박종민에게 사업을 넘겨야 했다. 박종민은 한양영배사라는 이름으로 한국 최초의 가설극장 허가를 얻어 쌍정리 김인재와 함께 사업을 계속했다.

그러나 변사 채봉이가 그만두자 외국 영화는 해설이 불가능하여 한국 영화만을 상영하고 있을 때, 쌍정리 이종춘이 이동영화사를 또 만들었다. 경쟁 상황에서 관객을 나누게 된 박종민과 이종춘은 합자로 일본에서 35㎜영사기를 구입했다. 그러나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고 곡성에서 임대 요청이 있자 이후 박종민은 가설극장으로 경기도 지방을 돌다가 7년 만에 돌아왔다. 이종춘은 서화 작품을 취급하다가 작가가 되어 전라남도 광주에서 활동하였다. 김인재는 박종민이 이종춘과 손을 잡자 혼자서 영업을 하게 되었다.

진도의 영화팬들은 극장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한명이의 손자 한길삼이 극장 자리를 동외리 정승주에게 팔아 그 곳은 대창여객이 되었고, 한길삼은 1962년 성내리에 옥천극장을 지었다. 그러나 16년 후인 1978년에 옥천극장이 문을 닫자 이 건물을 정승주의 동생 정승학이 사서 오늘에 이른다. 옥천극장의 건물은 가끔 변형된 나이롱극장이 한두 달 임차하여 건강식품·생활용품 등을 파는 속칭 약장사들의 사업장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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