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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005
한자 國難克服-堡壘永川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집필자 이재수

[정의]

경상북도 영천 지역에서 역사적으로 일어난 호국(護國)에 관한 사실.

[개설]

영천은 일찍이 고대부터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국난 극복의 보루 역할을 한 사례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하여 영천이 국가의 어려움이 있을 때 그를 극복하는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영천인들의 국난 극복의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고대]

1. 신라 김유신(金庾信)과 호국 여신(女神)

『삼국유사』 기이(紀異) 김유신(金庾信)조에 “……(김유신은) 기뻐하여 백석을 데리고 서울[서라벌]을 떠났다. 얼마쯤 가다가 어느 고개 마루에서 쉬게 되었는데, 어디서부터인지 두 낭자가 유신공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유신공이 골화천(骨火川)[현 영천시 완산동 지역]에 이르러 숙박을 하게 되었는데, 또 한 낭자가 홀연히 나타나서 유신공은 이들 세 낭자들과 얘기를 주고받아 친밀해지자 낭자들은 “공이 말씀하신 것은 잘 알아듣겠으나 원컨대 공은 백석을 떼어 놓고 우리와 함께 숲속으로 들어가면 다시 실정을 말씀드릴게 있습니다.”라고 아뢰므로 함께 숲속으로 들어갔다.

숲으로 들어가자 낭자들이 갑자기 귀신의 모습으로 변하여, “우리들은 내림(奈林)[현 경주의 낭산으로 비정되고 있음], 혈례(穴禮)[청도 오례산], 골화(骨火)[영천의 금강산] 등 세 곳의 호국신(護國神)이랍니다. 적국 사람이 공을 유인하였으나 공은 깨닫지 못하고 길을 떠나기에 우리들은 공을 만류하여 이곳까지 이르렀나이다.”라 말하고 사라져 버렸다. 이에 유신공이 놀라 엎어졌다 일어나 두 번 절하고 숲에서 나와 골화관[현 영천시 완산동 지역에 있었다고 여겨짐]에 이르러 유숙하고 있는……[……郞喜 親率白石夜出行 方憩於峴上 有二女隨郞而行 至骨火川留宿 又有一女忽然而 至…而共入林中 更陳情實 乃與俱入 娘等便現神形曰 我等 奈林·穴禮·骨火等 三所護國之神 今敵國之人誘郞引之 郞不知而進途 我欲留郞而至此矣 言訖而隱 公聞之驚仆再拜而出 宿於骨火館……”이라고 하는 김유신에 관한 유명한 설화가 있다.

이 설화에 의하면, 김유신은 장차 신라를 위하여 삼국을 자기 힘으로 통일해 보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김유신의 낭도(郎徒) 중에 신원이 모호한 백석(白石)이란 자가 있어, 김유신에게 “청컨대 공과 같이 몰래 먼저 적국[고구려]에 가서 정세를 정탐해 온 후에 정벌을 도모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김유신은 아무 것도 모는 채 백석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가 중간에 세 곳의 호국 여신(女神)을 만나 전후 사정을 알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후 김유신은 골화관에 이르러 유숙하고 있는 백석에게 일러,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중요한 문서를 잊어버렸으니, 바라건대 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 문서를 가지고 와야겠다.”고 하여 백석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온 다음 백석을 묶고 그 실정을 문초하니, 백석이 본래 고구려 사람으로 유신공이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을 우려하여 고구려로 유인하려 했음을 밝혔고 곧 백석을 사형에 처하고 세 여신에게 극진한 예를 갖추어 제사하였더니 모두 몸을 나타내어 흠향하였다 한다.

김유신의 유명한 설화를 통해 살펴보면, 뒷날 삼국 통일의 중추 역할을 하는 김유신 공이 이때 골화 여신을 만나지 못하고 적국 고구려에 유인되어 갔었다면 신라의 삼국 통일은 기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국난을 막은 곳이 영천시 완산동 일대였던 것이다. 뒤에 호국의 세 곳 신에 대한 제사는 신라의 대사(大祀)를 모시는 신라 삼산이 되었고, 그 중 하나인 골화는 바로 영천의 금강산이었다.

2. 금강성황보능장(皇甫能長)

신라 말기의 지배 질서 붕괴와 함께 농민들의 항쟁이 전국적으로 일어, 지방 세력이 성장하고 지방 사회가 재편되는 모습들이 나타났다. 이러한 시기에 성장한 호족(豪族)은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을 주도해간 세력이다. 나말여초의 이러한 호족들은 농민들을 동원하여 성을 중심으로 나름대로의 자위 조직을 가지고 대호족은 성주(城主)와 장군(將軍)을, 소호족은 대감(大監)과 제감(弟監)을 칭하고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 군웅이 할거하여, 백제 고토에서는 견훤(甄萱)이, 고구려 고토에는 궁예(弓裔)가 두각을 나타내어 독자적인 정권을 수립하여 몰락하는 신라와 함께 후삼국 시대를 맞게 되는데, 영천 지역에서도 골화소국 지역을 근거로 황보능장(皇甫能長)이 세력을 일으켜서 금강산성을 중심으로 한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의 안동도(安東道) 영천군조에 보면, “삼국 시대 임고군은 고려 태조 시 군인 금강성장군 황보능장의 공으로 골화 등을 합하여 영천이 되었다”고 하며, 또 신라 말에 “골화현의 금강성장군 황보능장이 일어난 지역인 골화 등 네 개현을 합하여 영천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금강성장군이라 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황보능장금강성을 중심으로 세력을 일으켰으리라 생각되며, 그가 일어난 지역이 골화와 도동 등의 지역임을 확인 할 수 있다.

『영양지(永陽誌)』 성곽조의 금강성(金剛城)을 보면, “신라 말 영남의 여러 주(州)가 견훤에게 함락될 때 황보능장이 골화와 도동현 등에 성을 쌓고, 이 성에 의거하여 백성을 안심시키고 사람들도 다시 돌아오게 하였는데, 태조가 나라를 세우자 귀부(歸附)하였고, 현재 성지가 남아 있다고 한다.”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하여 “금강성장군 황보능장태조를 보좌한 공로로 골화현·고야화군·도동현·사정화현을 합하여 영주(永州)로 하였다.”고 할 만큼 이 금강성을 중심으로 한 완산동 일대에서 황보능장견훤을 격퇴한 국난 극복의 활동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영천 황보씨의 시조가 되는 영천인 황보능장이 일찍이 나말여초에 이미 지역의 국난을 극복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은 ‘국난 극복의 보루로서의 영천’에 대한 내용의 단초를 보여 주는 사실이 될 것이다.

한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곳 완산 지역의 작산(鵲山)[가치미재]은 인민군을 거의 전멸시키다 시피한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영천의 이곳 완산동 일대는 영천 삼승지(三勝地)[황보능장견훤 격퇴, 임진왜란 시 왜적 격퇴, 6·25 전쟁 때 북한군 격퇴 등]로도 알려지고 있다.

[임진왜란과 영천]

1. 정세아(鄭世雅)권응수(權應銖) 장군의 활약

조선 시대에 들어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이 영천성을 침범하여 주둔한 지 두 달이 지난 7월에는 의병장을 선두로 각 지방 의진들의 활동이 활발해졌는데, 이곳 영천은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1535~1612]와 백운재(白雲齋) 권응수(權應銖)[1546~1608] 장군의 활약이 돋보였다.

정세아는 인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의병대를 조직하였고, 영천의 여러 의병대장들과 합세하여 영천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성을 수복하였다. 이후 한양이 수복되자 고향 자양으로 돌아가 학문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권응수 장군은 39세에 별시 무과에 올라서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의 막하에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서 의병을 일으켜서 의병장이 된 인물이다. 당시 왜군은 여러 곳에 분산하여 주둔하며 노략질을 일삼고, 영천의 왜군도 신녕·의흥·안동의 왜적과 서로 연락하며 그 수가 수만에 이르렀다. 이에 장군은 구국의 격문을 돌리니 각 곳에서 모여든 의병과 장군의 동생 권응전(權應銓)권응평(權應平), 같은 고을 사람 이온수(李溫秀)를 비롯하여 집안의 장정들을 데리고 그해 5월에 대동(大洞)[현재의 금호읍 대미동]과 화북면 한천(漢川)[현재의 화남면 삼창리]에서 적을 무찌르기 시작하며, 적에게 붙어서 주민을 괴롭히던 관노(官奴) 희손(希孫)을 잡아 죽이고 그의 무리 수백 명을 토벌하였다.

1592년 7월 14일에 왜적은 ‘봉고어사’라 속이며 300여 명이 군위에서 영천 쪽으로 내려왔는데, 이에 대항하여 권응수 장군은 신녕 의병 이온수정응거(鄭應琚), 박응기(朴應琪) 등과 합세하여 왜적 30여급을 참수하고 총통 25 자루, 창검 40여 자루와 말들을 빼앗아 우리 군의 사기를 크게 떨치었다.

2. 영천성 수복

1592년 7월 24일 영천·신녕·하양·경주의 관군 및 의병과 의흥·청송의 의병 등 모두 3,500여 명이 다시 모여 영천성을 회복하기 위해 합세하였으며, 경상좌도 병사 박진(朴晋)은 안강에 있으면서 군기와 화약류를 보내왔다.

이에 창의정용군(倡義精勇軍)의 깃발을 세우고 군기를 엄하게 다진 후 마현산(馬峴山)[현재의 꽃동산-시민운동장의 뒤쪽 산]과 영천성의 주위에 마른 나무와 섭나무 둥치를 많이 준비하도록 하고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군사들 틈에 세우고 나무를 베어 긴 사다리를 준비하였다.

이때 왜적은 남천에서 수백 명이 말을 씻기고 있다가 우리 의병의 모습을 보고 급히 성안으로 들어가자 숲속에 숨어 있던 400여 명의 우리 군사가 물을 길러 가는 왜적을 쫓으니, 왜적은 그 후 물이 없어서 마른 곡식을 먹게 되었다.

한편, 의병이 남천 가에까지 진군하자 명원루에서 왜장이 항복할 것을 권해 왔는데, 권응수 장군이 말을 몰아 적장을 쏘아 넘어뜨리니 왜적은 동요하였고, 7월 27일에 마침 바람이 크게 일자 바람을 이용하여 마현산 산마루에서 모래와 재를 날려 적진을 요란케 하고 화공을 하면서 사방에서 성문을 깨트리고 왜적을 대파하니 남은 적들은 강을 건너 경주로 달아났다.

이 전투에서 왜적의 시체는 산을 이루고 시체 타는 냄새가 십리 밖까지 풍기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영천성을 다시 찾은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큰 반격전이요 승리였다.

이로써 경상좌도로 올라가던 왜구들은 보급로가 끊어져서 곤궁에 빠졌고, 영천성 수복으로 경상좌도를 확보하고, 나아가 영남을 보전할 수 있게 한 것이다.

[6·25 전쟁과 영천전투]

1950년 9월 5일부터 1950년 9월 13일까지 9일간에 걸친 영천지구 공방전은 한국전쟁의 국운을 바로 잡은 큰 전투였다. 북한군은 6월 25일 새벽을 기하여 10개 보병여단과 1개 전차사단으로 기습 남침하여 27일 만에 삼팔선에서 220㎞나 되는 대전까지 진격하였으며, 9월 5일에는 영천까지 침입하게 되었다.

1950년 9월 6일부터 제8사단은 영천으로 침입해 온 인민군 제15사단 주력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이때 사단 공병대대는 경주로 향하려는 적의 진로를 차단하고 한 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는 굳은 결의와 투지로써 적 부대의 주력을 격멸하여 놈들의 전의를 상실하게 하고 우군의 사기를 충천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9월 16일에 총반격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당시 영천지구 전적비문에는 “아 잊으랴 그날을! 사람의 발자국이 아닌 아귀의 발악이 아름다운 이 산하를 뒤덮을 때 오직 자유와 평화를 위해 죽음을 사양하지 않던 그대들 정의의 넋이 무쇠처럼 굳었던 당신들의 결의를 잊을 수 없어 여기 공훈을 기념하노라.”라고 되어 있다.

1970년 9월에 제9033부대가 세운 이 영천지구 전적비문을 보면 6·25 전쟁 당시 치열했던 영천지구의 공방전의 모습과 적 부대 주력을 격멸하여 마침내 9월 16일 대 반격의 전기를 마련하여 역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듯이, 풍전등화 같은 국운을 되돌린 그야말로 영천이 국난 극복의 보루였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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