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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고 서원 병배 논쟁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13
한자 臨皐書院幷配論爭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 462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642년연표보기 - 장현광의 임고 서원 합향론 대두
종결 시기/일시 1643년연표보기 - 장현광을 임고 서원 배향으로 이정 확정
성격 논쟁
관련 인물/단체 조호익|장현광|정몽주

[정의]

1642년(인조 20)부터 1643년 사이에 장현광 병·배향 문제를 놓고 벌어진 지산(芝山) 문인과 여헌(旅軒) 문인의 논쟁.

[개설]

임고 서원 병배 논쟁은 영천 임고 서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병·배향을 둘러싸고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문인과 여헌 문인으로 나뉘어 전개한 논쟁으로 여헌학맥의 확산을 기하고 자신들의 학문적 입지를 보다 공고히 하고자 했던 여헌 문인과 이를 저지하려 한 지산 문인이 충돌한 사건이다.

[역사적 배경]

17세기 초 영천 유림들은 정구(鄭逑)·조호익·장현광 등을 통해 퇴계의 학풍을 계승하였다. 성주 지역을 중심으로 강학 활동을 전개했던 정구에 비해 영천과의 연고성을 강화했던 조호익장현광의 문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았고 영향력도 컸다.

특히 가장 오래 생존했던 장현광정구조호익이 사망하자 이들의 문인까지 규합했고, 만년 강학처이자 고종처였던 영천은 단일 군현으로서는 가장 많은 문인을 배출함으로써 인동과 더불어 여헌학맥의 양대 거점이 되었다.

장현광임고 서원 합향론이 대두된 것은 사후 5년 째 되던 1642년(인조 20)으로, 그 문인들이 스승의 추숭 사업들을 왕성하게 전개하던 시기였다. 임고 서원 합향 역시 그 일환에서 추진된 것이다.

[경과]

1642년(인조 20) 정몽주를 주향하는 임고 서원장현광 합향이 결정된 후 병향, 배향, 종향으로 구분되는 합향의 등위 문제가 발생하였다. 즉 배향(配享)이냐 병향(竝享)이냐 하는 위차(位次)가 실질적인 문제였다.

배향을 주장하는 지산 문인측은 정몽주의 학통이 사림오현(士林五賢)[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을 거쳐 정구·장현광에게 이어졌다고 보는 포은연원설(圃隱淵源說)과·포은후학설(圃隱後學說)을 근거로 사림파 학맥의 연장선상에서 배향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반면 여헌 문인측은 불유사승설(不由師承說)에 입각하여 배향론자들의 주장을 부정하며 병향을 강행하였다.

병향론자들이 영천 지역 여헌 문인들 주도하에 인동·선산 사림의 지원을 받으며 일을 추진한 데 반해 배향론자들은 경중(京中) 여론과 관학을 통해 외원(外援)을 확보함으로써 병행론을 저지하려 했다.

[결과]

포은연원설은 한강계열과 안동권 유림으로부터 일정한 호응을 받았고, 1643년(인조 21) 정몽주의 후손 정준(鄭儁)이 상소하여 위차 정정을 촉구하였다. 같은 해 태학·숭양서원(崧陽書院)·충렬서원(忠烈書院)으로부터 배향론을 지지하는 통문이 답지함으로써 상황은 변화되어 갔다.

이러한 공론 확산에 따라 예조는 “임고 서원장현광을 병향한 것은 잘못되었으므로 배향으로 이정하는 것이 옳다”라는 요지의 인조 처분을 받았다. 아울러 당시 조정의 승지로 재직하던 지산 문인 중 한 명인 김육(金堉)이 건의한 계(啓)가 받아들여져 예조의 관문(關文)이 하달됨으로써 약 7개월간 지속되었던 병배 논쟁은 일단락된다.

이 병배 논쟁으로 영천 지역 여헌 문인들은 큰 타격을 입었고, 이후 영천 지역에서 독자적인 여헌학맥을 계승·발전시켜 나가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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