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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26
한자 獨立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6년 3월 - 정용기 산남의진 조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9년 3월 - 영천 지역 만세 시위 운동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8년 6월 2일 - 근우회 영천지회 창립 대회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4년 8월 - 박기수 경북 지방에 독립당 조직
민족 해방 운동 신녕공립보통학교 만세 운동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화성리 714번지|완전동지도보기
민족 해방 운동 영천읍 만세 시위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입석리 지도보기
민족 해방 운동 영천면 과천동의 만세 시위 운동 - 경상북도 영천군 영천면 과천동

[정의]

1895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의 침략과 강점에 대항하여 영천 지역에서 전개되었던 민족 해방 운동.

[개설]

영천 지역의 독립 운동은 1895년(고종 32) 을미의병(乙未義兵)에서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는데, 1895년 을미의병과 1906년 산남의진(山南義陣)의 의병 투쟁, 1919년 3·1 독립운동, 1920년대 대중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1930년대 해외 독립운동과 국내 독립운동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내용/구성]

1. 한말의 국권 회복 운동

한말의 의병 전쟁은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일제의 한국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甲午變亂)과 1895년 8월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사건, 그리고 11월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1896년 경상북도 지방에서도 의병 봉기를 촉구하는 통문과 격문이 각 지역 향교를 중심으로 돌았는데, 현재 영천 향교에는 모두 4건의 의병 격문과 통문이 남아 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영천 지역에서도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산남의진(山南義陣)을 조직하였다. 산남의진은 대장 정용기가 체포된 이후 중군장 이한구(李韓久)가 지휘하다가 1906년 7월 해산하였다. 그 후 석방된 정용기는 1907년 4월 재기하여 죽장·입암·포항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동년 9월 초 입암전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아 전사하였다. 아들을 대신하여 대장이 된 정환직(鄭煥直)이 1907년 12월 청하에서 체포·순국한 뒤 최세윤(崔世允)이 1908년 7월까지 산남의진을 이끌고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계몽 운동은 신교육 구국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근대 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는데, 1908년 은해사(銀海寺)의 승려들을 중심으로 설립된 해창학교(海昌學校), 1908년 설립된 사립 영흥학교(永興學校)가 주목된다. 사립 영흥학교는 1909년 명륜학교(明倫學校)로 개칭하였다가 1910년 봉명학교(鳳明學校)로 다시 개칭하였다.

2. 3·1 독립운동

영천 지역에는 1919년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까지 신녕면 화성동과 완전동 등지에서 전개된 신녕 공립 보통학교 만세 운동과 화북면 입석동에서 전개된 영천읍 만세 시위 운동, 그리고 영천면 과천동의 만세 시위 운동 등이 있었다. 그 중에서 주목되는 신녕 공립 보통학교 만세 운동은 교사와 학생들이 함께 전개한 만세 시위 운동으로 영천 지역 만세 시위 운동이 확산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3. 1920년대 대중 운동

1919년 3·1 독립운동 이후 영천에서도 청년회가 조직되었으나 일제 경찰의 무리한 단속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1920년 7월 조직된 영천 엡웟 청년회(永川엡웟靑年會)가 1921년 영천 기독 청년회(永川基督靑年會)로 개칭된 이후, 영양 청년회(永陽靑年會)·영천 구락부(永川俱樂部)·금호 청년회(琴湖靑年會)·신녕 청년회(新寧靑年會) 등이 1925년 조직되었다.

1927년 8월 영양청년회가 영천 청년 동맹(永川靑年同盟)으로 개편되었다가 1933년 4월 해체하였고, 신간회(新幹會) 영천지회는 1928년 2월 15일 창립 1주년 기념식을 개최하였다. 근우회(槿友會) 영천지회는 1928년 6월 2일 신간회관에서 창립 대회를 열고 집행위원장으로 김순혜(金順蕙)를 선출하였다. 영천 소작조합(永川小作組合)은 1926년 11월 18일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동척 소작료 문제를 비롯하여 가혹한 지주의 부정한 소작료 징수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고자 하였다.

4. 1930년 이후의 독립운동

일제 말기 영천 출신의 국외 망명과 독립운동은 매우 활발하였다. 영천 오산 출신 안병철(安炳喆)과 삼창 출신 조재만(曺再萬)은 1920년대 초 백학 학원(白鶴學院)에서 수학하고 동기생 이육사(李陸史)와 함께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가 1932년 10월 김원봉(金元鳳)이 설립한 조선 혁명 군사 정치 간부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를 졸업한 안병철은 1933년 7월 국내로 잠입하여 영천 오산 출신의 이진영(李進榮)이원대(李元大)에게 의열단 간부학교 입교를 권유하여 남경으로 건너갔다.

그 외 영천 출신으로 박만선(朴晩善)정원흥(鄭元興)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공작원으로 밀명을 받고 입국하였다. 박만선은 1943년 5월 경상북도 영천의 신사 방화와 동년 7월 14일 대구 주둔 일본군 부대 탄약고 폭파를 시도하다가 체포되었는데, 그는 1942년 9월 길림성 장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장춘주재원 박동만(朴東晩)을 만나 임무를 부여받았었다.

정원흥은 1944년 3월 초순 임시 정부의 지령에 따라 귀국하여 영천 지방의 유지 정도영(鄭島榮)과 협의한 뒤 대구 동촌 비행장을 폭파하려다가 실패하였다.

한편, 박기수(朴基秀)는 1944년 8월 국내에 비밀 지하 거점을 확보하라는 임시 정부의 지령을 받고 귀국하여 경북 지방에 독립당(獨立黨)을 조직하고 항일 의식을 고취하려다가 영천에서 체포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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