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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봉림사 영산회상도」 및 복장 유물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69
한자 永川鳳林寺靈山會上圖-腹藏遺物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천문로 2149-36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동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724년연표보기 - 「영천 봉림사 영산회상도」 제작
문화재 지정 일시 2006년연표보기 - 「영천 봉림사 영산회상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3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09년 2월 23일연표보기 - 「영천 봉림사 영산회상도」 보물 제1612호로 지정
현 소장처 봉림사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천문로 2149-368[자천리 2372]지도보기
원소재지 법화사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성격 불화
재질 비단에 채색
크기(높이) 350㎝
너비 333㎝
소유자 봉림사
관리자 봉림사
문화재 지정 번호 보물 제1612호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자천리 봉림사의 대웅전에 봉안된 조선 후기의 불화.

[개설]

봉림사는 신라 문무왕 때[661~681] 의상(義湘)이 창건한 보현산의 법화사를 옮겨와서 1742년(영조 18) 징월(澄月)이 창건한 사찰이다. 그 뒤 1857년(철종8) 소월(韶月)이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천 봉림사 영산회상도」봉림사 대웅전의 삼존불 뒤에 걸린 탱화로 화기에 “옹정이년갑진사월초순시조우윤사월회일필공봉안어경상좌도신녕현지북령보현산법화사대웅전···(擁正二年甲辰四月初旬始造于閏四月晦日畢功奉安於慶尙左道新寧縣地北嶺普賢山法華寺大雄殿…)”의 기록이 있어 1724년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에 있는 보현산 법화사에 조성, 봉안되었던 영산회상도임을 알 수 있다.

비단 바탕에 채색한 탱화로 화승인 쾌민(快旻)과 체준(體俊) 등이 그렸다. 전체 크기는 가로 333㎝, 세로 350㎝, 화면 크기는 가로 317㎝, 세로 339㎝이다. 영산회상도가 200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83호로 지정된 후, 2009년 2월 23일 발원문, 후령통 등의 복장유물 5종 6점을 포함하여 국가지정문화재인 보물 제1612호로 지정되었다.

[형태]

「영천 봉림사 영산회상도」는 가로보다 세로가 조금 더 큰 불화로 석가여래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제자들에게 설법(說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상(靈山會相)이다. 중앙의 결가부좌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8대 보살과 범천·제석천을 배치하고, 가장자리에는 사천왕상을, 보살 뒤쪽으로는 10대 제자와 타방불(他方佛) 그리고 천부중(天部衆)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한 전형적인 군도(群圖) 형식을 하고 있다. 화면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인물을 작게 묘사하여 본존인 석가여래에게 시선이 집중되도록 구도를 안배하였다.

[특징]

「영천 봉림사 영산회상도」는 본존에 표현된 키 모양의 광배(光背)와 뾰족한 육계(肉髻), 양감 있는 인물 표현 등은 보물 제1611호로 지정된 「경주 기림사 비로자나삼불회도(慶州祇林寺毘盧遮那三佛會圖)」[1718년 제작]와 유사한 면이 엿보이지만, 본존을 중심으로 권속(眷屬)이 빽빽하게 둘러싼 구성이나 적색과 녹색이 강한 대조를 이루는 색채감 등은 다른 특징을 드러낸다.

다소 석가가 커보이긴 하지만 권속들의 크기를 고루 작게 하여 석가불을 빽빽이 둘러싸는 매우 안정적인 구도를 이룬다. 영산회상에 참가하는 전체 인물들을 석가불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여 맨 앞에 사천왕, 석가불 좌우에 보살과 제자, 분신불, 그리고 가장 뒤에 팔부중이 있다.

꽃문양으로 채워진 키형 광배를 지닌 석가불좌상은 항마촉지인의 손모양을 하고 연화대좌에 결가부좌한 자세이다. 이마 가운데 나발 2알이 표현된 얼굴은 조그만 이목구비가 가운데로 모여있다. 네모진 상체에 걸쳐진 우견편단 법의의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으로 흘러 내리는 듯하고 이전에 비해 매우 얇아진 느낌을 준다. 또한 전보다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은 보살의 영락장식, 구름 표현 등에서 볼 수 있다. 다소 두텁고 가라앉은 듯한 채색은 여전히 녹색·주색·청색·황색이지만 화려한 녹색과 주색을 주조로 하늘색 등 농담의 차이를 주면서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의의와 평가]

불화의 화기와 함께 복장낭(腹藏囊)이 남아있어 후령통이나 발원문을 통해 18세기 전반기 불화의 양식은 물론, 당시의 후불화를 봉안하는 형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