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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계집판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612
한자 朴蘆溪集板木
이칭/별칭 노계집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물/유물(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383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세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690년연표보기 - 이윤문 박노계집판목 처음 간행
제작 시기/일시 1704년연표보기 - 박성규 박노계집판목 초교본 완성
제작 시기/일시 1831년연표보기 - 박천주·박희주 박노계집판목 간행
제작 시기/일시 1904년연표보기 - 박노계집판목 추각 간행
보수|복원 시기/일시 1964년 - 박수문 박노계집판목 개각·추각 간행
문화재 지정 일시 1974년 12월 10일연표보기 - 박노계집판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박노계집판목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7년 4월 5일 - 박노계집판목 한국국학진흥원 기탁
현 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220번지
원소재지 도계서원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산 4번지 지도보기
성격 책판
재질 나무
크기(높이, 길이, 너비) 높이2.5㎝|길이22.3㎝|너비53.7㎝
소유자 박병일-도계서원
관리자 한국국학진흥원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있는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의 문집을 새긴 판목.

[개설]

노계 박인로 선생의 판목은 도계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68장의 『박노계집』 책판을 말한다. 『박노계집』은 조선 선조 때 가사문학의 선구자인 시인 박인로[1561~1642]의 시문집이다.

박인로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 정세아(鄭世雅)의 휘하에서 활동하였고,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 선전관을 거쳐 만호를 지냈다. 이후 물러나 고향에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많은 걸작을 남겼다. 특히 한글가사를 많이 지어 가사문학을 일으키는데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태평사(太平詞)」·「선상탄(船上歎)」·「사제곡(莎堤曲)」·「독락당(獨樂堂)」·「영남가(嶺南歌)」·「노계가(蘆溪歌)」·「입암별곡(立巖別曲)」·「입암29곡(立巖29曲)」 등이 『노계집』에 실려 전하고 있다. 뒷날 선생의 학덕과 충효 사상을 경모하여 사림이 북안면 도천리도계서원을 세워 해마다 향사를 올리고 있다.

[형태]

『박노계집』은 모두 3권 2책으로 68장의 책 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판심제는 『노계집(蘆溪集)』으로 되어 있고, 어미(魚尾)는 내향이엽화문어미(內向二葉花紋魚尾), 광곽(匡郭)은 사주쌍변(四周雙邊), 상하비선(上下鼻線)은 백구(白口), 행 수는 10행, 한 행의 자수는 20자이다. 완본 수는 68장이며 현재 수는 33장, 결락 수는 35장이다. 계선(界線)과 마구리는 있고, 인간연도(印刊年度)는 1831년·1904년·1964년이다.

[특징]

『박노계집』이덕형의 증손인 이윤문(李允文)이 1690년(숙종16) 영천 군수로 부임하여 선조와 관련된 몇 작품을 모아 목판으로 처음 간행한 것으로 보이나 전해지지 않는다.

1704년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이 찬(撰)한 행장에 의하면 후손 박성규(朴聖規)가 유문을 모아 편차와 교정을 의뢰하면서 동시에 가사의 간행 사실도 언급했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노계집』의 초교본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묘비를 세우면서 문집의 간행을 도모하여 후손 박경호(朴慶濩)가 김유헌(金裕憲)에게 서문을 받고 1831년 후손 박천주(朴天柱)와 박희주(朴希柱)가 원집과 부록 상·하권으로 나누고 가사(歌辭)는 별권으로 편차하여 목판으로 간행하였다.

1904년 권2에 「속부(續附)」와 권3에 「속간(續刊)」을 추각하여 간행하면서 몇 글자를 보각하였다. 이때 ‘정종경신[正宗庚申(1800)] 간(刊) 광무갑진[光武甲辰(1904)] 인(印)’이라는 간기(刊記)를 넣으면서 초간본의 간행 시기를 1800년으로 추정하였는데, 내용을 비롯하여 초간본 간행에 참여한 인물 등을 고려해 보면 초간본 간행 시기를 잘못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64년 후손 박수문(朴洙文)이 본래의 목판에서 훼손된 것은 개각하고, 새로 발견된 「입암29곡(立巖二十九曲)」 중 7수 등 저자의 작품으로 밝혀진 것을 추각하고, 또 권상규(權相圭)의 「후서(後敍)」를 실어 간행하였다.

현재 조사된 것은 초간본으로 사용된 목판을 비롯하여 1904년과 1964년에 추각하여 간행할 때의 목판이 뒤섞여있다. 초간은 권2-39와 권3-33[훼손판]까지 였는데, 1904년 추각하여 간행하면서 권2-39와 권3-33을 훼손하고 권2-42와 권3-33[추각판]으로 늘렸다. 1964년 다시 간행을 하면서 권2에서는 1904년의 권2-44를 훼손시키고 권2-45까지 추각하였고, 권3에서는 권3-28을 훼손시키고 권3-28의 1과 권3-28의 2를 추각하고 권3-33을 파기하고 권3-35까지 추각하였다.

문집의 내용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책머리에 김유헌의 「서문」과 「목록」이 있다. 「목록」의 목판은 1831년 본의 것이며, 그 마지막에 1964년 본에 실린 「후서(後敍)」[권상규(權相圭)]를 보각하였다.

권1에는 「세계도(世系圖)」와 「중용성도(中庸誠圖)」 등의 ‘도(圖)’ 라는 1편의 ‘부(賦)’, 5언절구(9)·5언율시(3)·7언절구(7)·7언율시(5)·7언고시(2) 등의 ‘시(詩)’, 「무하옹전(無何翁傳)」이라는 1편의 ‘전(傳)’, 「몽견주공기(夢見周公記)」라는 1편의 ‘기(記)’가 편차되었다.

권2는 부록으로 「무하옹전구인산기발(無何翁傳九仞山記跋)」[장현광(張顯光)]·「만사(輓詞)」[조호익(曺好益)]·「행장行狀」[정규양(鄭葵陽)]·「묘갈명(墓碣銘)」[이정병(李鼎秉)]·「수갈위안문(竪碣慰安文)」[정하원(鄭夏源)][이상 1831년본], 속부(續附)로 「차영죽운(次詠竹韻)」[정호의(鄭好義)]·「차산자운 차인자운 겸치경앙지사(次山字韻 次人字韻 兼致景仰之思)」[정하원][이상 1904년본], 「입암서원통문(立巖書院通文)」[이상 1964년본] 등으로 편차되었다.

권3은 「태평사(太平詞)」 등의 가사와 「조홍시가(早紅柿歌)」 등의 시조가 편차되었는데, 「자경(自敬)」까지 판각된 권3-33이 1831년 본이고, 「속간(續刊)」까지 판각된 권3-33이 1904년 본이다. 「입암곡(立巖曲)」 7수를 추각한 권3-28의 1 및 권3-28의 2과 「후서(後敍)」및 「속간」까지 추각한 권3-35까지는 1964년 본이다.

[의의와 평가]

박노계집판목은 1974년 12월 1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산 4번지에 있는 도계서원에서 보관하던 것을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하였다. 『박노계집』은 조선 시대 가사문학의 선구자인 노계 박인로 선생의 문집으로 목판 실물이 보존되어 있어 조선 시대 출판과 인쇄 문화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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