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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672
한자 靈芝寺大雄殿-梵鐘閣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471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찬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592년 - 영지사[웅정암] 소실
개축|증축 시기/일시 임진왜란 이후 - 영지사 대웅전 및 범종각 중창, 중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603년 - 원찬이 중창, 영지사로 개칭
관련 사항 시기/일시 1774년 - 영지사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88년 9월 23일연표보기 - 영지사 대웅전 및 범종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7호로 지정
개축|증축 시기/일시 1992년 - 영지사 대웅전 중수
현 소재지 영지사 대웅전및 법종각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영지길 471[용호리 14]지도보기
성격 불전
양식 다포계 팔작집
정면 칸수 3칸
측면 칸수 2칸
소유자 영지사
관리자 영지사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7호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에 있는 영지사의 대웅전 및 범종각.

[개설]

영지사(靈芝寺)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구룡산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0교구 본사인 은해사(銀海寺)의 말사이다. 경내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07호인 대웅전 및 범종각를 비롯해서 명부전·산신각·요사·삼층석탑과 입구에 임자갑유공비(壬子甲有功碑)와 역대 주지승의 부도(浮圖) 5기가 있다.

[위치]

영지사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서원못안마을 안쪽의 절골에 위치한다. 이곳은 경상북도 영천시와 경산시의 시계 지점에 위치한 구룡산[해발 674.7m]의 서쪽에 해당되며, 뒤로는 오지산 12봉이 병풍처럼 둘러 서 있으며, 사찰 앞으로는 구룡산 및 오지산 능선의 절골에서 발원한 대창천의 소지류가 훌러 나간다.

접근로는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에서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리간 909번 지방도[금창로]로 8㎞가량 가다가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대재리조곡리 경계지점에서 영지길로 갈아 탄 뒤 신광리와 도화리 그리고 그 곁의 도잠서원을 지나 5㎞가량 들어온 지점의 산 속에 있다.

[변천]

권상로의 『한국사찰전서』에 따르면 영지사는 “신라 무열왕의상(義湘)이 창건하여 웅정암(熊井庵)이라 했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한 후 1603년(선조 36) 지조(智照)와 원찬(元贊)이 중창하고 이름을 영지사(靈芝寺)로 바꿨다. 1992년 주인인 비구인 중안(重岸)이 대웅전을 중수했다. 유적·유물로는 대웅전과 명부전·범종각·요사채 2동 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경상북도가 발간한 『문화재대관』에는 “임진왜란의 병화로 소실되고 영지대사가 주창하여 영지사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조선 1774년(영조 50)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영지사 초창은 신라 때라 하나 증빙할 자료가 없고, 대웅전 및 범종각은 임란 이후의 중창과 중수된 건물로 보인다.

[형태]

대웅전은 경내 요사채와 심검당 사이의 북쪽에 위치한다. 건물은 사역 북쪽의 산사면에 바짝 붙여 자연석 기단을 높게 축조한 곳에 정면 3칸[220×285×220㎜], 측면 2칸[220×220㎜]에 다포계 팔작집을 남향으로 배치했다.

간살은 정면 어칸이 양 협칸보다 2척(尺)가량 넓게 설정했고, 양 측면은 동일하다. 작은 규모임에도 팔작지붕으로 꾸민 점은 주 불전의 위상을 고려한 결과로 보인다. 구체부는 자연석 초석 위에 10개의 두리기둥을 세운 뒤 창호와 벽체로 마감했고, 창호는 전면 각 칸과 양 측면에 두었다.

특히 양 측면 창호 위치는 좌측면의 경우는 앞칸에, 우측면은 뒷칸에 각기 설치되어 있다. 전면 창호는 어칸에 화려한 쌍여닫이 굽널 꽃살문, 양 협칸에는 솟을살문을 달았다. 양 측면의 창호는 외여닫이 굽널세살문이다.

내부 바닥은 우물마루로 꾸미고, 뒷벽 각 칸마다 불단을 설치하고 불상을 안치했다. 주상부는 창방과 평방을 결구하고 외 3출목, 내 4출목의 다포계 공포로 꾸몄다. 주간포는 어칸만 2조씩, 그 외는 1조씩 배열했다. 주간포의 배열에서 주목되는 점은 어칸의 2조는 등간격으로 배열되어 있으나 양 협칸은 공간포 1조를 우주쪽으로 각기 편재해 배열한 것이다. 이런 공간포의 편재된 배치는 양 측면 각 칸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제공 형태의 외단은 1-3제공까지 전·양 측면으로 앙서와 연꽃조각, 후면은 앙서와 당초조각이고, 4제공은 전·양측·후면에 수서와 연봉조각, 5제공은 전면 어칸 주상에는 용두, 기타는 봉두로 장식했다. 내단은 1제공부터 4제공까지 당초문을 조각해 장식했다.

이 건물에서 주목할 것은 내부 상부가구이다. 전·후면 3제공 위에 대량을 걸고 양측면 중앙 기둥상에는 대량과 직교하는 충량을 각기 걸어 결구했다. 그리고 대량 및 충량 위에 우물 ‘정(井)’자로 평방형 부재를 걸고, 그 위에 2출목의 공포를 꾸며 종량을 받치고 있다. 즉 대량과 충량 위에 평방형 부재를 왕찌로 짜고 외 2출목의 공포를 꾸며 중대공을 대신함과 동시에 내부 상부의 화려함을 극대화시켰다.

공포 구성은 평방형 부재의 네 모서리 왕찌 위에 4개, 전·후면 각 4개, 양 측면 충량 직상에 각 2개씩 총 14개이다. 특히 우물 ‘정(井)’자형 왕찌 상부에 놓인 공포는 우주상의 전각포와 한 몸으로 이어지도록 주두를 45도 방향으로 배치해서 맞추었다.

우리나라 다포계 팔작집 중에 충량없이 대량 위에 평방형 부재를 올리고 그 위에 재차 공포를 꾸며 종량 및 상부가구를 받도록 예는 그리 많지 않다. 이런 특이한 구조 수법은 운문사 대웅보전이나 관룡사 대웅전 등 조선 후기 영남 지역의 주불전에서 소수 보인다.

영지사 대웅전 역시 전통적인 가구 수법을 토대로 새로운 창의적인 구조 기법을 구사한 장인과 그것을 용인한 당시의 사회적 현상을 읽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에 한식기와를 이었고, 네 모서리에는 활주로 받쳤다.

범종각은 대웅전 영역보다 한 단 낮은 경내 입구에 위치한다.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구조는 중층 누각에 익공계 팔작집이다. 상·하층은 벽 없이 사방이 트여 있고, 대웅전 앞 중정에서 진입할 수 있게 후면 어칸에 통로를 내어 출입하고 있다. 현재 범종각 좌우[좌측은 계단, 우측은 경사로]로는 대웅전 영역으로 접근하는 통로가 있다.

상층에는 사방으로 계자각헌함을 돌리고 내부 바닥에 우물마루를 깐 뒤 사물[법고·운판·목어·법종]을 걸었다. 구조는 두벌대의 자연석 기단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상·하층에 별주의 두리기둥으로 세운 다음 주상부에는 창방과 이익공으로 꾸몄다. 각 주간 사이의 창방과 장혀 사이에는 화반 1구씩을 배치했고, 상부가구는 5량가이다. 지붕은 한식기와를 이은 겹처마 팔작집이다

[현황]

영지사는 깊은 구룡산 능선 말단에 배산하여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은 대웅전·명부전·심검당·범종각·요사채·일주문 등 9동과 부도 4기, 석탑 1기 등이다. 가람 배치는 ‘ㅗ’자형으로 특이하다. 즉 사역 초입에 역대 주지의 부도 4기가 있고, 그 다음으로 일주문과 범종각이 차례로 서향으로 배치되어있다.

범종각 북쪽으로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요사채·심검당·명부전 등 중심 영역인데, 범종각과는 축선을 달리하며 ‘ㄷ’자형으로 남향 배치되어 있다. 이는 입지한 지형에 맞춰 가람을 배치한 결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영지사 대웅전 및 범종각은 조선 후기에 건축된 건물로 건립 당시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최근에 요사채 등 건물 몇 동을 신축함에 따라 제법 가람의 규모를 갖추었지만 그 전에는 소규모 지방 사찰의 모습이었다. 즉 가람 배치는 임진왜란 이후 주 불전인 대웅전과 요사채 등 최소의 규모로 가람을 구성했던 조선 후기 소규모 지방 사찰의 일반적인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아울러 입지한 자연 환경을 고려한 대웅전 및 범종각의 배치 구성, 대웅전의 전반적인 장식화 경향과 대량 위 평방형 부재에 공포 구성 등 새로운 구조 기법의 모색이 돋보이는 드문 건물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