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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703
한자 永川龜厓亭
분야 생활·민속/생활,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귀호1길 37-2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태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세기 후반 경 - 영천 귀애정 창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17년 - 영천 귀애정 중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978년 - 영천 귀애정 보수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78년 - 영천 귀애정 중수
문화재 지정 일시 1997년 12월 19일연표보기 - 영천 귀애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39호로 지정
현 소재지 영천 귀애정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귀호1길 37-25[귀호리 644]지도보기
성격 누정
양식 몰익공 ‘ㄱ’자형|겹처마|팔작지붕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3칸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39호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에 있는 조선 후기 학자 조극승의 추모정.

[개설]

조극승(曺克承)[1803~1877]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본관이 창녕이고 자는 경휴(景休), 호는 귀애(龜厓)이다. 조극승은 성품과 도량이 돈후하고 단정했으며, 효도와 공부에 힘써 1831년 순조(純祖) 신묘년(辛卯年)에 식년문과에 등제했다.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고 집 근처[현재 귀애정 터]에 작은 건물을 짓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위치]

영천 귀애정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귀호리 구일마을 남쪽 산록에 북동향으로 있다. 익산포항고속도로 북영천 나들목에서 청송 방면으로 가다가 화남면사무소 뒤로 나 있는 화남~신녕 간 도로를 따라 가면 작은 4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우회전 해 들어가면 귀호리 구일마을이 보인다. 귀애정은 귀애마을 초입의 좌측에 귀애고택과 함께 보인다.

[변천]

영천 귀애정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극승이 태어난 고택 인근에 작은 정사 건물을 짓고 후학에 힘썼다는 기록을 볼 때 19세기 후반 경에 초창되었으리라 판단되며 조극승의 사후[1877] 공을 추모하기 위해 1917년 후손들이 정사 터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했다.

동년 귀애정 좌측에 연접해 조극승의 사당 2칸을 건립했다. 1978년 정자의 기둥과 마루의 보수가 있었고 귀애 선생이 불천위로 모셔지면서 사당을 현재의 3칸으로 증축했다. 1997년 12월 19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39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영천 귀애정은 구일마을 남쪽의 산 북동 사면의 끝자락에 펼쳐진 선상지의 경사지에 있다. 배치는 후고전저(後高前低)형의 지형에 정자와 사당 그리고 연지의 세 구역으로 구분해 북동향으로 앉혔다.

정자는 전면의 방지(方池)쪽을 제외한 세 면을 방형의 토석 담장으로 두르고 담장 우측면 중앙부에 일각문을 세워 출입케 했다. 일각문을 들어가 ‘ㄱ’자형의 정자 정면 쪽으로 가면 정자 전면으로 방형의 연지가 운치를 더한다. 정자 앞마당을 지나면 사당으로 통하는 사주문을 빠져나와 우측의 일각문을 통해 사당으로 진입하게 된다. 정자로 진입은 모두 세 곳으로 우측면의 누마루로 오르거나 배면 양 단의 쪽마루로 진입하도록 했다.

귀애정의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一’자형 주사(主舍) 건물에 정면 1칸, 측면 3칸의 ‘|’자형 익사(翼舍) 건물을 합해 전체적으로 정면 4칸, 측면 3칸의 ‘ㄱ’자형이다.

주사를 ‘몽희헌(夢喜軒)’[희(喜)자는 정확히 판독하기 어렵지만 기타 문헌에 ‘희(喜)’로 표기되어 있어 인용함], 익사를 ‘수월루(水月樓)’라 편액하여 전체를 귀애정이라 한다.

익사의 누마루는 살림집의 사랑채 등에 부설해 내루로 불리어지는 평면 형식으로 정자 건축에도 많이 쓰인다. 주사는 좌측에서부터 온돌방+온돌방+마루를 배열하고 앞 열 전체에 반 칸의 마루를 깐 퇴칸, 뒤 열에 반침, 대청 뒤로는 마루를 깐 반 칸의 퇴칸을 두어 전체적으로 전·후퇴형의 구조를 가진다.

익사는 반침+온돌방+퇴칸[마루]+마루[누마루, 내루]로 구성되어 앞의 연지 너머에 자연 경관[보현산]을 바라보도록 설계했다. 내루의 삼면과 주사의 전면에는 계자각 난간을 두른 헌함을 두었고 주사 좌측면과 익사 우측면 내루[누마루] 뒤로는 쪽마루를 부설하고 가장자리를 평난간으로 꾸몄다.

창호는 주사의 온돌방의 경우 전면과 좌측면에 쌍여닫이 세살창을 달고 내부에 미닫이창과 두껍닫이를 두어 중창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방과 방 사이[불발기맹장지창]와 방과 반침 사이는 네짝 미서기문을 달아 유사시에 공간 확장을 꾀했으며 좌측 방 뒤의 반침칸 좌측면에는 외부에서 출입이 가능하도록 외여닫이 세살창을 달았다.

익사의 온돌방 역시 전면과 우측면 그리고 반침 등에 주사의 경우와 동일하게 했다. 주사의 대청은 전면과 청방 간에 4분합 들문을 달았고 배면의 퇴칸 사이에는 쌍여닫이 세살창을 달았다. 주사와 익사의 모든 창호를 개방하면 전체가 다 통하도록 공간 확장을 꽤했다. 익사의 누마루의 경우 전면과 좌·우측면에 4분합 들어열개창[4분합 들창]을 설치했으나 현재는 제거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전면의 퇴칸 양 측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단 흔적이 있으나 현재는 없다.

구조는 내루 전면을 제외한 나머지를 외벌대의 기단을 두고 전병 주초[다듬은 주초]와 덤벙 주초[자연석 주초]를 앉혔는데 내루의 전면에만 높은 원형 초석을 앉혔다. 기둥은 전면과 양 측면에만 두리기둥[원형기둥]을 세우고 나머지는 각기둥[네모기둥, 방형기둥]을 세워 주 상부를 받치고 있다.

주 상부는 창방과 주두 그리고 보아지를 결구해 보와 행공 그리고 몰익공[물익공, 익공이 있으나 초각하지 않고 사절 혹은 직절한 익공]을 받고 있다. 보 위로는 장혀를 놓고 굴도리를 앉혀 서까래[연목] 등의 지붕 가구를 구성하고 있다. 특히 창방과 주심도리 장혀 사이 간살에는 중앙부에 연화를 초각한 화반을 두어 구조와 미를 동시에 충족시키고 있다.

[현황]

영천 귀애정은 현재 정자 앞 연지에 육각 정자와 이곳으로 통하는 목교가 복원되어 있다. 『영천문화유산답사기』에 따르면 약 20년 전에 연지 내 섬에 육각 정자와 정자로 통하는 목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특히 방형 연지의 귀애정 쪽 석축은 중앙부가 연지 쪽으로 ‘ㄷ’자형으로 돌출되어 있는데 이는 연지의 가운데에 있는 육각정으로 다리를 놓기 위해 축조된 접안부로 추정되나 현재 복원되지는 못했다.

[의의와 평가]

영천 귀애정의 중건 연대가 여러 문헌에 1915년 혹은 1916년으로 나오지만 『화산지(花山誌)』에 “대정육년 정사중건(大正六年 丁巳重建)”이라고 되어 있어 중건 연대의 정확한 고증이 필요하다. 정자 앞 연지의 ‘ㄷ’자형 접안부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증을 통해 그 기능 등을 밝혀 귀애정의 전체 배치 형태 등을 복원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