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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795
한자 永川治日里仁宗胎室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권혜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521(중종 16)년 1월연표보기 -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 중 아기씨 태실 조성
훼손 시기/일시 1535년 9월 -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 훼손
훼손 시기/일시 1535년 12월 -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 훼손한 범인 및 수직자(守直者) 처벌
개축|증축 시기/일시 1546년 5월연표보기 -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 가봉 완료
개축|증축 시기/일시 1680(숙종6)년 8월 -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 개수
이전 시기/일시 1928년 8월 - 인종 치일리 인종 태실에서 태호와 태실비, 지석을 서삼릉으로 이봉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9년 3월 29일~9월 15일 -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 (재)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 시행
문화재 지정 일시 2004년 6월 28일연표보기 -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50호로 지정
관련 사항 시기/일시 2007년연표보기 -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을 영천시에서 보수, 복원함
현 소재지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 지도보기
원소재지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산24
성격 태실
양식/형태 팔각원당형
소유자 영천시
관리자 영천시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있는 조선 중기의 태실.

[개설]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은 영천에 설치한 조선 인종의 태실이다. 태실이란 왕족의 태반을 묻은 석실(石室)을 말하며 태봉(胎封)이라고도 한다. 왕실의 자손이 태어나면 의식과 절차를 거쳐 태를 묻은 시설을 말한다. 태실은 아기의 태를 최초로 설치한 아기 태실과 아기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기 태실에 추가로 화려한 석물을 치장하여 가봉(加封)한 가봉 태실로 구분된다.

태를 항아리에 담아서 보관한 후 미리 정해진 태봉에 태실을 조성하고 태항아리와 지석을 묻게 되는데 이를 장태(藏胎) 또는 안태(安胎)라고 한다. 기본 형태는 가봉 이전에 지하에 태호를 넣은 석함을 묻고 흙을 덮은 후 앞에 표석만 세웠다가 왕이 되면 가봉을 거쳐 석물을 갖추게 된다.

우리나라는 신라 시대 김유신 태실의 문헌기록이 가장 이르며, 현재 확인되는 것은 모두 조선 시대 왕실의 태실들이다. 조선 시대 안태의식(安胎儀式)은 1928년 이왕직(李王職)에서 작성한 『태봉(胎封)』에 잘 나타나 있다. 자손이 태어나면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고 길일과 길지(吉地)를 선택해 안태사(安胎使)를 보내어 태를 묻게 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병전(兵典) 잡류(雜類)에는 태실 조성이 끝나면 태실의 간수군(看守軍)을 두어 보호하는데, 선왕과 선왕후는 각 4명으로 하되, 4대손이 다하면 2명으로 하며 왕과 왕비는 각 8명, 왕세자는 4명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실은 하삼도(下三道)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옛 선인들이 남쪽을 길지로 여긴 데 기인한 것이다. 태실의 설치는 군현(郡縣) 명호(名號)의 승격 및 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고 영역 확대 등의 특혜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어 자기 지방에 유치하고자 지역 간의 분쟁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위치]

영천 치일리 인종 태실은 하양읍에서 신녕 간 919번 지방도를 따라 12.5㎞ 지점에 있는 은해사[대한조계종 제10교구]에서 뒤편 서쪽의 신일지(新日池) 부근의 삼거리[좌측길-백흥암, 우측길-운부암]에서 산 쪽으로 800m 간 태봉산에 있다. 태실봉은 팔공산 주능선의 여러 지맥 중 동쪽으로 뻗은 지맥에 형성된 봉우리로 둥근 봉우리 정상에 있는 입지여건을 충족하고 있다.

[형태]

인종 태실은 장타원형[50×34m]의 평탄지로 조성되어 있는 봉우리 정상에 있으며, 그 형태는 팔각원당형이다. 발굴 조사 당시 현장에는 아기 태실비 없이 귀롱대(龜籠臺)·가봉비(加俸卑)·비좌(碑座)·상석(裳石)·사방석(四方石)·동자석(童子石)·죽석(竹石) 등 11가지 석물이 남아 있었다.

조사 결과 태실의 구조는 우선 지하 깊이 태호석함을 안치하고 지상에 사각의 사방석을 놓은 뒤 그 위에 상하협상(上下狹狀)의 원통형 중동석(中童石)과 팔각형 옥개석을 얹었으며 그 둘레 지면에 팔각형으로 전석과 상석을 깔고 우전석에는 주석과 동자석을 세운 다음, 그 위에 죽석으로 난간을 설치하였다.

태실의 방향은 동남향의 술좌진향(戌座辰向)으로 전석의 모서리부분이 정면을 향한다. 가봉비인 아기 태실비와 태호(胎壺), 지석(誌石)은 서삼릉에 보관되어 있는데, 비석 전면에는 ‘인종대왕태실(仁宗大王胎室), 후면에는 ‘자경북영천군청통면이봉○년오월(自慶北永川郡淸通面移封○年五月)’이라고 새겨져 있다.

태항아리는 뚜껑과 몸체에 봉합 천과 봉합 끈이 남아 있고 이중의 백자 항아리로 구성되어 있다. 지석은 장방형으로 대리석 재질이다. 규모는 가로 25.2㎝, 세로 22.5㎝, 두께 4.5㎝이고, 제작 시기는 1512년이다. 총 명문 수는 32자로 전면에 ‘황명정덕십년이월이십오일술시생세자호태정덕십육년정월십칠일오시장(皇明正德十年二月二十五日戌時生世子峼胎正德十六年正月十七日午時藏)’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현황]

인종 태실은 1928년 경기도 서삼릉으로 태호·태실비·지석을 이봉한 후 남은 석물들을 2007년 영천시에서 1999년 발굴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복원하였다. 한쪽에는 복원하고 남은 석재들이 모아져 있다.

[의의와 평가]

1515년(중종 10) 장경 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의 장남으로 태어난 인종이 죽은 뒤 명종이 즉위하면서 문정 왕후의 수렴청정에 의해 배불시책(排佛施策)이 완화된다. 이 영향으로 은해사가 당시 왕실의 원찰(願刹)역할을 하였고 전국의 명당 중 하나로 선택되었다. 영천에 설치된 인종 태실은 다른 태실보다 규모가 크고 각종 석조물의 장식이 화려하며 웅장하다. 또한 태실의 조성 연대가 분명하므로 당시 태실의 조형 양식, 조각 기법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11.08 [형태] 오자 수정 후면에는 ‘자경북연천군청통면이봉○년오월(自慶北永川郡淸通面移封○年五月)’이라고 새겨져 있다. -> 후면에는 ‘자경북영천군청통면이봉○년오월(自慶北永川郡淸通面移封○年五月)’이라고 새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