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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직 손씨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948
한자 一直孫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조선 전기 - 손진충 출생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590년 3월 10일 - 손진충 사망
본관 일직 손씨 - 경상북도 안동시
입향지 입향지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매호리[당시의 아천면 동산촌]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세거지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도천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세거지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당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세거지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용계리 지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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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세장지 동산정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매호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손응(孫凝)
입향 시조 손진충(孫盡忠)

[정의]

손응(孫凝)을 시조로 하고 손진충(孫盡忠)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세거 성씨.

[연원]

일직(一直) 손씨는 안동(安東) 손씨라고도 하며, 선계(先系)는 고려 초 중국 송(宋)나라 개국 2대 위(魏)왕, 3대 기(冀)왕 때 황제(皇帝) 등극을 두고 내란이 일어나 왕족과 귀족 세력이 고려로 망명·귀화하여 온 손응(孫凝)을 시조로 하고 있다.

원래 성은 순(荀)씨였으나 고려 제7대 목종이 시해되고, 제8대 왕이 된 현종의 이름 순(詢)과 발음이 같다고 하여 손씨로 하사받았다고 전하고 있다. 그 후 고려 장군 손간(孫簡)·손린(孫隣) 등은 세계(世系)가 명확하지 않고 휘(諱)만 전해오며, 복주(福州)[지금의 안동]를 세거지(世居地)로 삼았고, 14세(世)인 손진충이 안동 송천(松川)에서 영천 아천면 동산촌[현 임고면 매호리]으로 이거하여 정착하였다.

[입향 경위]

일직 손씨로 영천에 처음 입향한 사람은 앞서 기록한 손침(孫忱)의 둘째 아들인 손진충이다. 손진충이 영천으로 옮겨 살게 된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며, 그가 처음 터를 잡은 곳이 아천면 동산촌으로 일찍부터 영천 이씨의 세거지라는 점과 그의 부인이 영양(永陽) 이씨라는 점에서 보면 다른 성씨와 마찬가지로 처가의 동네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손진충의 장인 장사랑(將士郞) 이렴(李濂)은 원나라 봉승랑(奉承郞) 겸 관농방어사(觀農防禦使)로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고 본국으로 돌아와 지울주사(知蔚州事)가 되어 울산군(蔚山君)에 봉해졌다.

이렴은 영양 이씨 울산군파 중시조가 된 이중영(李仲榮)의 후손으로 대를 이어 벼슬이 끊이지 않은 채 영천 아천면에 세거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손진충임고면 매호리 입향 경위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현황]

입향 이후 인물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간행된 향지 『영양지(永陽誌)』『익양지(益陽誌)』『영천전지(永川全誌)』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입향조인 손진충(孫盡忠)과 그의 아들 손우남(孫宇男)을 비롯하여 정묘호란 때 창의한 손해(孫瀣), 진사(進士) 손항(孫沆), 문행(文行)이 뛰어난 손필(孫泌), 정묘호란 때 창의한 손백무(孫栢茂), 정묘호란 때 창의한 손환(孫煥), 진사(進士) 손세탁(孫世鐸), 그리고 문장으로 이름난 손준(孫濬), 손익모(孫翼謨), 손종원(孫宗元), 손종구(孫宗龜), 손종록(孫宗祿), 손종주(孫宗柱), 손기로(孫奇老), 손희로(孫喜老), 손규해(孫奎海), 손규협(孫圭協), 손석휴(孫錫休), 손석정(孫錫貞), 손석지(孫錫址), 손석우(孫錫禹), 손해영(孫海永), 손태영(孫泰永), 손기영(孫冀永), 손규준(孫圭濬), 손무영(孫珷永) 등이 있다.

일직 손씨 세계(世系)는 크게 2파로 분류되는데, 고려 충정왕 때 좌대언공(左代言公) 손득수(孫得壽)[홍량의 맏아들]로부터 이어지는 좌대언공파와 공민왕 때 전공판서(典工判書) 겸 진현관(進賢舘)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손득령(孫得齡)[홍량의 둘째 아들]으로부터 이어지는 판서공(判書公)파이며, 이에 따른 각 소파(小派)는 전부 41개 파로 분류되며 현재 인구수는 약 3만여 명이다.

세거지는 좌대언공파의 경우는 안동·밀양·의성·대구·청도·김해·울산 등지에 있고, 판서공파의 경우는 안동·영주·영천·경주·봉화·춘양[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에 있다. 또 고려 말 영의정 손홍양의 동생 손홍우(孫洪佑)로부터 이어지는 시중공(侍中公)파는 충청도로 세거지를 이동했다.

손진충이 영천에 입향한 후 영천의 각 지역에 흩어져 세거를 하게 되는데, 주요 세거지는 처음 손진충영천 이씨에게 장가들어 살던 임고면 매호리[동산]에 거주하다가 입향조의 현손 대에 이르러 형제들이 영천시 북안면으로 이주하여 도천리·당리·용계리·상리·북리·옥천리·임포리·도유리 등에 세거하게 되고, 일부는 영천시 금호읍 지역에 세거하게 된다.

손진충의 손자 손필(孫泌)의 후손은 경상북도 경주시로 옮겨 강동면 인동리·오금리·왕신리·모서리·호명리 등과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양월리 등에 거주하고 있다.

한말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만주와 일본 등지로 옮겨 살다가 광복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지만 아직까지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영천의 일직 손씨는 다섯 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명문집안이라는 자부심으로 아직까지 직계 20대까지 선조의 묘소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관련 유적]

영천 지역에 남아있는 문화 유적은 자양면 성곡리용화리, 북안면 북리 등에 재실이 있었으나 일부는 철거되고 일부는 저절로 허물어져서 현재까지 보존된 곳은 처음 시거지인 임고면 매호리에 남아 있는 손우남(孫宇男)동산정(東山亭)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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