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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974
한자 權應銖
이칭/별칭 중평(仲平),백운재(白雲齋),충의(忠毅)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6년 11월 21일연표보기 - 권응수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84년 - 권응수 별시 무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92년 12월 - 권응수 좌도조방장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593년 9월 - 권응수 좌도 방어사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594년 1월 - 권응수 경상도병마좌별장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599년 - 권응수 밀양부사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603년 - 권응수 충무위호군에 임명됨
활동 시기/일시 1604년 - 권응수 선무공신 2등에 녹훈되고 화산군에 책봉됨
활동 시기/일시 1606년 - 권응수 경상도방어사에 임명됨
몰년 시기/일시 1608년 7월연표보기 - 권응수 사망
활동 시기/일시 1608년 - 권응수 남영장에 임명됨
추모 시기/일시 1625년 - 권응수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로 임명됨
추모 시기/일시 1693년 - 권응수 시호 충의가 내려짐
출생지 권응수 - 경상북도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 지도보기
묘소|단소 권응수 -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 지도보기
성격 무인
성별
본관 안동
대표 관직 도총부 도총관|경상도 방어사
저술 백운재실기(白雲齋實紀)

[정의]

조선 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무인.

[개설]

권응수(權應銖)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의병장으로 많은 공훈을 세워 1604년(선조 37)에는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책록되어 효충 장의 협력 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졌다. 이어 도총부 도총관이 된 뒤 1606년 경상도방어사, 1608년 남영장(南營將)을 겸하였으나 그해 7월 사망했다.

[가계]

안동 권씨(安東 權氏)의 시조인 권행(權幸)은 신라 왕실의 후손으로, 원래 성씨는 김씨(金氏)였다. 서기 930년 왕건(王建)의 고려군이 견훤(甄萱)의 백제군과 대치하자, 김선평(金宣平)·장정필(張貞弼)과 함께 고창군(高昌郡) 병산에서 백제군과 싸워 크게 이기는 공을 세웠다. 이에 왕건이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키고 식읍(食邑)으로 내림과 동시에 권씨(權氏) 성을 하사한 것이 안동 권씨의 시작이다.

권응수의 자는 중평(仲平), 호는 백운재(白雲齋). 1546년(명종 1) 11월 21일 영천시 화산면 가상리에서 태어났다.

권응수(權應銖)의 고조는 영천 입향조인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열(權挒)이고, 증조는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 권처정(權處貞)이며, 조부는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 권란(權鸞)이다.

부친은 우찬성(右贊成) 능라군(綾羅君) 권덕신(權德臣)이며, 모친은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성주 이씨(星州 李氏)로 통례(通禮) 이운겸(李云謙)의 딸이다. 선처는 안도(安道)의 딸로 1녀를 두니 사위는 봉사(奉事) 조축(曺軸)이다. 후처는 유씨(柳氏)로 참봉(參奉) 유영(柳苓)의 딸이다.

[활동 사항]

권응수는 1584년(선조 17) 별시(別試)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수의부위권지(修義副尉權知)를 거쳐 훈련원 부봉사(訓鍊院副奉事)로서 의주[용만]를 지켰다. 그 뒤 경상 좌수사 박홍(朴泓)의 막하에 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 돌아가 의병을 모집하여 궐기하였다.

1592년 5월부터 의병 활동을 전개하여 여러 곳에서 전과를 올리고, 6월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박진(朴晋)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7월에 각 고을의 의병장을 규합하여 의병 대장이 되었다. 이 무렵 영천에 있던 적군은 신녕·안동에 있던 적군과 연락하면서 약탈을 일삼고 있었다. 권응수는 7월 14일에 박연(朴淵)에서 적을 공격하여 궤멸시키고, 22일에는 소계(召溪)·사천(沙川)까지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권응수는 군세를 정비하며 영천성 공격을 위해 선봉장으로 홍천뢰(洪天賚), 좌총(左摠)으로 신해(申海), 우총(右摠)으로 최문병(崔文炳), 중총(中摠)으로 정대임(鄭大任), 별장(別將)으로 영천군수(永川郡守) 김윤국(金潤國)을 삼았다.

7월 25일에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시작하고, 26일에는 결사대원 5백 명을 적진으로 돌격시켜 크게 격파하고, 다음날에는 화공(火攻)을 전개하여 영천성을 수복하였다. 이후 신녕·의흥·의성·안동의 적은 모두 한 곳에 모였고, 영천의 적은 경주로 후퇴하였다.

이 같은 공적으로 권응수는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우후가 되었으며, 좌병사 박진의 휘하에서 8월 20일 제2차 경주 탈환전에 선봉으로 참가하였으나 패전하였고, 그해 12월에는 좌도조방장으로 승진하였다.

1593년 2월 권응수는 순찰사 한효순(韓孝純)과 함께 7군의 군사를 모아 문경 당교(唐橋)에서 적을 대파하고, 25일에는 산양 탑전(山陽塔前)에서 적 1백여 명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좌도병마절도사가 된 권응수는 4월에 안동의 모은루(慕恩樓) 밑에서 적을 크게 격파하고 구담(九潭)까지 추격하여 1백여 명을 사살하였고, 7월에는 밀양의 적을 격파하여 9월에는 좌도방어사로 특진되었다.

1594년 정월 경상도 병마좌별장이 된 권응수는 4월에 황룡사(黃龍寺) 부근에서 적을 격파하였다. 그해 7월 충청도 방어사를 겸직하게 된 그는 이사명(李思命)의 군사를 대신 거느리고 은진현감 이곡(李穀)과 함께 창암(倉巖)에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군대를 대파하였다. 1595년 정월에는 경상좌도 방어사를 겸하였고, 4월에는 형강(兄江)에서 적을 대파하였다.

1597년 9월 정유재란 때 관찰사 이용순(李用淳), 병마절도사 김응서(金應瑞)와 같이 달성까지 추격하였다. 11월에는 왕명으로 명나라의 부총병(副總兵) 해생(解生)을 따라 함경·강원 양로(兩路)의 병을 거느렸고, 경리(經理)인 양호(楊鎬)와 마귀(麻貴)를 따라 1·2차 울산 전투에 참가하였다.

1599년 밀양부사를 겸하게 된 권응수는 다음해에는 의흥위부사직(義興衛副司直)을 맡았고, 1603년에는 충무위호군(忠武衛護軍)에 올라 경연에 입시하였으며,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으로 책록되어 효충 장의 협력 선무공신(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이라 하고 화산군에 봉해졌다.

이어 도총부 도총관이 된 뒤 1606년 경상도 방어사, 1608년 남영장(南營將)을 겸하였으나 그 해 7월 서울의 한 여관에서 병사하였다.

[학문과 저술]

목판본인 4권 2책의 『백운재실기(白雲齋實紀)』가 있다.

[묘소]

권응수의 묘소는 영천시 청통면 애련리(愛蓮里) 천곡(泉谷)에 건좌(乾坐)를 향하고 있으며, 윤봉구(尹鳳九)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권응수는 효충장의협력선무(效忠仗義協力宣武)에 책훈되고 화산군에 봉해졌다. 1625년 숭정대부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로 추증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신령의 경덕사(敬德祠)에 제향되었다. 1693년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영천시 신녕면 치산리귀천서원(龜川書院)과 어사영각(御賜影閣)이 있으며, 화남리권응수 장군 유물, 경충사(景忠祠)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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