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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023
한자 曺光益
이칭/별칭 가회(可晦),취원당(聚遠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순홍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37년연표보기 - 조광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64년 - 조광익 별시문과 을과 1위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76년 - 조광익 중시 갑과에 장원으로 급제
몰년 시기/일시 1578년 5월 5일연표보기 - 조광익 사망
묘소|단소 조광익 묘 소 - 경상남도 밀양시 오방동
성격 문인
성별
본관 창녕

[정의]

조선 전기에 활동한 경상북도 영천 지역의 문인.

[가계]

조광익(曺光益)은 본관은 창녕. 자는 가회(可晦), 호는 취원당(聚遠堂)이다. 고조는 군수(郡守) 조말손(曺末孫)이며, 증조는 청백리(淸白吏) 조치우(曺致虞), 조부는 군수(郡守) 조효연(曺孝淵)이다. 조광익의 아버지는 조윤신(曺允愼)이며, 어머니는 증(贈) 정부인(貞夫人) 인동 장씨(仁同 張氏)로 장중우(張仲羽)의 딸이다.

부인은 숙부인(淑夫人) 밀양 박씨(密陽 朴氏)로 참봉(參奉) 박홍미(朴弘美)의 딸이며, 슬하에 1남 3녀를 두었다. 아들은 별제(別提) 조이복(曺以復), 사위는 홍대해(洪大海), 여강인(驪江人) 이의윤(李宜潤), 도사(都事) 정장(鄭樟)이다.

[활동 사항]

조광익은 1537년(중종 32)에 태어났고,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1년(명종 16)에 생원이 되고, 1564년 별시문과 을과(乙科) 1위로 급제하였으며, 1576년(선조 9) 중시(重試)에 갑과(甲科) 장원을 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지냈다.

효심이 깊은 조광익은 친상(親喪)을 당해 상례(喪禮)가 어김이 없었고, 어머니를 지극히 봉양하니 향리는 물론 밀양·창원·영천의 사림(士林)이 감복했고, 순찰사(巡察使)가 그의 효행을 글로 써서 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1572년(선조 5) 동짓달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여묘(廬墓)를 했는데, 건강을 크게 해쳐 정구(鄭逑)·이이(李珥) 등 제현들이 글로써 타일렀으며, 도내 사림들이 그의 효행을 적어 조정(朝廷)에 올리기도 했다.

여묘를 마친 조광익은 평안도부사(平安道府使)를 자청하여 강동(江東)에 적거(謫居) 중인 동생 조호익(曺好益)과 만나 형제간의 정회(情懷)를 풀다가 병에 걸려 1578년(선조 11) 5월 5일 42세를 일기로 임지(任地)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묘소는 경상남도 밀양시 오방동(五榜洞) 서록(西麓)에 유좌(酉坐) 향으로 위치하며, 이후경(李厚慶)의 갈문(碣文)이 있다.

[상훈과 추모]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에 효자 정려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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