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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성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376
한자 盧成基
이칭/별칭 성오(聖五),침계당(沈溪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몰년 시기/일시 1910년연표보기 - 노성기 사망
거주|이주지 노성기 이주지 - 경상북도 영천시 대전동
묘소|단소 노성기 묘소 -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내칠동후산(內漆洞後山)
성격 문인
성별
본관 광주

[정의]

조선 후기 경상북도 영천 지역 출신의 문인.

[가계]

노성기(盧成基)의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성오(聖五), 호는 침계당(沈溪堂)이며, 1845년(헌종 11) 현재의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직천리에서 태어났다. 증조는 부호군(副護軍) 노사속(盧思涑)이며, 아버지는 노정갑(盧鼎甲), 어머니는 평산 신씨(平山申氏)로 신상훈(申相勳)의 딸이다. 부인은 오천 정씨(烏川鄭氏)로 정유용(鄭裕瑢)의 딸이며, 슬하에 2남 3녀를 두니 아들은 노수영(盧秀英)·노수준(盧秀俊), 사위는 정진훈(鄭鎭勳)·홍찬수(洪燦修)·김규찬(金奎贊)이다.

[활동 사항]

노성기는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두터워 아우인 제우당(悌友堂) 노병기(盧炳基)와 더불어 세상 사람들이 ‘강굉(姜肱)의 우애’에 비교하여 칭찬하였다.

인품이 관대하여 힘써 모은 자산으로 기근(饑饉)에 시달리는 향리(鄕里) 사람들을 널리 구휼하여 이름이 높았다. 또한 선조를 받드는 마음이 지극하여 입향 선조의 묘소 아래 묘재인 추모재(追慕齋) 건립에 앞장서고, 마을에 서당을 창설하여 향리의 인재 양성에도 힘썼다.

한말의 혼란기에 화적(火賊)을 피하여 영천시 대전동에 옮겨 산 적이 있으며, 1910년(순종 4)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

노성기의 묘소는 경상북도 경주시 산내면 내칠동후산(內漆洞後山)에 있으며, 손규호(孫奎鎬)의 갈문(碣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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