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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곡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1765
한자 心谷齋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매호리 270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우경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909년연표보기 - 심곡재 건립
현 소재지 심곡재(心谷齋) -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매호리 270 지도보기
성격 재사
양식 장혀수장
정면 칸수 4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영천 이씨 상장군파
관리자 영천 이씨 상장군파
문화재 지정 번호 비지정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매호리에 있는 이감(李敢)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재사.

[개설]

문한당(文閒堂) 이감은 려말 선초의 문신이다. 자는 의민(義民), 호는 첨정자(添丁子)이고, 영천 이씨 상장군파의 8세손이다. 1388년 문과에 장원, 간관(諫官)이 되어 직언으로써 그 명성을 떨쳤다. 1390년(공양왕 2) 9월에 사헌규정(司憲糾正)으로서 무절제한 시상(施賞)을 극론(極論)하다 지방의 감무(監務)로 좌천되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간관들이 일제히 병을 핑계로 집무를 거부하자 곧 사헌지평(司憲持平)[정 5품]에 임명되었다.

1392년(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가 살해될 때, 정도전(鄭道傳) 등 신진세력의 미움을 받아 장사에 유배되었고,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하자 북청(北靑)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풀려나 고향인 합천에 은거하였다. 이후 행의(行誼)로 천거되어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종4품]·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종3품] 등을 지냈고, 효성이 지극하여, 상을 당한 후 여막에서 3년간을 시묘하니, 병오년에 나라에서 선덕(宣德)으로 정문(旌門)을 세워 상을 내렸다.

[변천]

심곡재 대청상부 종도리 장혀 하부에 ‘숭정기원후오주갑기유세윤정묘(崇禎紀元後五周甲己酉歲閏丁卯).....’묵서가 기록되어 있어 1909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건물 조영 당시 목부재는 다른 건물에서 해체된 부재를 옮겨와서 사용하였다고 한다.

[형태]

심곡재임고면 매호리 맘실마을 산자락에 남향하여 세워진 건물이다. 주변 일곽은 토석 담장을 둘렀고 우측 담장에 사주문을 세워 재사로 출입케 했다. 재사는 정면 4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실의 배열은 가운데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1칸씩의 방을 드린 중당협실형(中堂夾室型)이다.

정지한 대지에 기단은 자연석 1단 규모로 축조하였는데 외피는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하였다. 초석은 넓적한 자연석 초석을 놓고 대청 전면 중앙에 원주 하나만 세우고 나머지는 모두 각주를 사용하였다. 각주는 단면 크기가 200×200㎜로 규모에 맞는 적절한 것을 세웠다. 기둥상부는 좌·우로 납도리와 장혀를 끼우고 전·후로는 자연목 그대로의 굽은 대들보를 결구하였다.

가구는 3량 구조로 대들보 위에 판대공을 세우고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문은 방의 경우 전면에 쌍여닫이 세살문을 달았고 측면에는 외여닫이문을 달았다. 청방간 출입문은 하부에 굽널을 끼우고 상부는 정자살로 꾸민 쌍여닫이 굽널정자살문을 달았다. 우물마루를 깐 대청 전면은 창호 없이 개방되어 있는데 주심도리 장혀 아래 장부 구멍이 있어 당초 문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대청 뒷벽에는 각 칸에 쌍여닫이 판문을 달았다.

방 전면과 대청 전·후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여 공간 확장을 꾀했는데 대청으로 오르는 부분의 쪽마루는 대청마루와 방 전면 쪽마루와의 높이차를 두어 진입부를 강조하였다. 처마는 홑처마에 맞배지붕 형식으로 측면에는 박공만 달아 측면 가구가 노출되어 있다.

[현황]

심곡재의 마당은 관리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시멘트로 포장되어 있고, 재사용한 목부재의 상태는 비교적 양호한 편이다. 벽체의 경우 벽면에는 회미장으로 마감하였는데 부분적으로 탈락되어 있고, 연목과 연목 사이에는 황토 미장으로 되어 있는데 균열이 많이 가고 탈락된 곳도 많다.

창호는 살대의 훼손 없이 양호한 편이나 좌측 방 측면 문은 소실되고 없다. 방 내부 바닥은 비닐 장판을 깔고 벽체는 종이 벽지로 마감하였다. 천장은 별도의 마감 없이 연목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심곡재는 매년 양력 4월 1일 묘제를 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심곡재는 건립 연대가 명확하고, 건축 기법이나 양식이 조선 시대 기법대로 건축되었다. 가구 방식도 간결, 소박할 뿐 아니라 건축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외관 또한 매우 뛰어나므로 보존할 만한 가치 있는 건물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