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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과 중악석굴」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2171
한자 金庾信-中嶽石窟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
집필자 김지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설화|전설
주요 등장 인물 김유신
모티프 유형 역사 인물|풍수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일리에 있는 중악석굴김유신에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김유신과 중악석굴」은 삼국 통일을 이룬 김유신 장군이 굴속에서 수도를 했다는 이야기로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언급되어 있으며, 이 석굴이 경북 영천시 팔공산 자락에 있는 중악석굴임을 밝히고 있다.

김유신은 17세 때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중악석굴에 들어가 수련하며 어느 노인으로부터 방술의 비법을 익혔는데, 이러한 흔적이 바위에 남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영천시 팔공산중악석굴 외에도 충청북도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사지마을 뒷산인 사자산 중턱에도 김유신의 수련처였던 중악석굴과 장수굴이라 알려진 곳이 있다.

[내용]

경상북도 영천시 청통면 치유리 은해사 중암암(中巖庵)에는 김유신 장군이 수도한 곳으로 거론되고 있는 ‘중악석굴’이 있다. 팔공산은 바로 신라 5악의 하나인 중악이다. 신라의 5악은 가야의 명산이던 지리산이 남악, 백제의 명산 계룡산이 서악, 고구려의 명산 태백산이 북악, 신라의 명산 토함산이 동악이며 이들의 중앙부에 위치한 팔공산을 중악으로 삼은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에 이 5악에 중사(中祀)라는 나라의 큰제사를 올렸으며, 중악의 석굴을 팔공산에 있는 중암암 석굴로 비정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아울러 중암암 석굴이 있는 팔공산 전체가 산세나 위치로 보거나,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된 대소 40여 개의 사찰로 보아 화랑도의 중요한 수련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은해사에서 백흥암(白興庵)을 거쳐 팔공산(八公山)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면 중암암에 이른다. 이 절은 9세기경에 세워졌으며, 절 뒤에는 천연의 석굴이 있다. 석굴은 2층으로 형성된 것으로 넓이는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이나, 특이한 구조로 엄숙하고 장엄한 느낌이 들어 수도처로서 이상적이다.

속칭 장군굴이라고도 하는 석굴은 상·하층 구조이며 전후좌우가 거대한 암벽에 둘러싸여 있고 석굴 뒷편의 북쪽 암벽 사이에는 ‘장군수’라는 약수가 있다. ‘장군굴·장군수’의 ‘장군’은 ‘김유신’을 의미하고, 이 중암암의 석굴이 김유신의 수도처란 말이 팔공산 산간 사찰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래서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언급된 ‘중악’의 석굴이 이곳이라 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실린 “김유신은 17세 때에 홀로 ‘중악’의 석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맹세하며 기도하였다”는 내용은 중악석굴에 관한 것으로 소년 김유신이 큰 뜻을 품고 무술을 연마하게 된 과정을 잘 기술하고 있다.

김유신은 15세 때 화랑이 되었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기꺼이 따르며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진평왕 건복 33년, 김유신의 나이 17세 때 고구려·백제·말갈 등이 국경을 침범하는 것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외적을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혼자 중악석굴에 들어갔다.

그는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고하여 “적국이 무도하여 짐승같이 우리의 영역을 소란스럽게 하여 편안한 해가 없으니 나라의 환란을 없애겠다”는 뜻을 세웠으니 도와 주기를 청하였다.

김유신이 석굴에 들어온 지 4일이 지나자 갑자기 갈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독충과 맹수가 많은 이 무서운 곳에서 귀한 소년이 혼자 무슨 일로 왔는가?”하고 물었다. 노인의 이름은 난승으로 일정한 주거가 없고 인연 닿는 대로 가고 머문다고 하였다.

김유신은 노인이 범상한 사람이 아님을 알고 절을 올린 뒤 자신은 신라인으로서 나라의 원수를 보니 가슴이 아파 여기에 와서 누군가를 만나기를 바라고 있었다고 하고, 자신의 정성을 불쌍히 여겨 방술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였다.

김유신이 눈물을 흘리면서 예닐곱 번이나 간청하자 그때서야 노인은 “어린 나이로 삼국을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있으니 장하다”라며 비법을 가르쳐 주면서 “절대 함부로 남에게 전하지 말 것이며, 만약 비법을 의롭지 않은 일에 함부로 사용할 경우 도리어 재앙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동굴을 나섰다. 김유신이 곧 뒤따라 가보았으나 이미 흔적이 없고 오직 산 위에 오색찬란한 빛만 서려 있었다고 한다.

건복 34년에 인접한 적국의 침략이 점점 긴박하여지자, 김유신은 더욱 더 장한 뜻을 품고 보검을 차고 홀로 열박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향을 피워 놓고 하늘에 고하며 중악에서와 같이 축원하고 맹세하면서 기도하였다.

3일째 되는 날 밤에 허수(虛宿)와 각수(角宿), 두 별자리의 빛이 환하게 내려오자, 칼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이는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 나오는 중악석굴에 관한 내용으로 소년 김유신이 큰 뜻을 품고 무술을 연마하게 된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문경현은 1983년 발표한 「소위 중악석굴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3권으로 된 김유신 열전의 원전(原典)인 김유신 행록이 김유신의 현손이었던 김장청에 의해 만들어진 삼국 통일 이후의 개념으로, 설사 통일 이전에 중악이 있었다 하더라도 경주분지의 중심을 벗어나 있는 단석산은 중악이 될 수 없다는 점과 단석산이 호국신의 주처(主處)인 삼산(三山)의 중앙에 위치하므로 중악이라 불렀다 하나 삼산 가운데 혈례·청도(穴禮·靑道)의 위치 비정이 잘못되었으므로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역사상 단석산을 중악이라 호칭한 사실을 발견할 수가 없다.

단석산이 곧 중악이라는 설은 단석산의 암석 형상을 김유신 전설과 결부시킨 후대의 전승을 수록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 비롯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중악이란 다름 아닌 대구의 팔공산이며, 은해사의 암자인 중암암 뒤의 석굴이 곧 중악석굴이다”라고 주장했다.

은해사의 산내암자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중암암(中巖庵)에 이르는 길은 마치 요새의 석문처럼 생긴 자연바위를 거쳐야 한다. 이 바위 덕분에 ‘돌구멍 절’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또 중암암은 통일신라 때인 834년(흥덕왕 9)에 동화사를 창건한 분으로 진표(眞表)영심(永深)을 이은 신라 법상종의 제3조인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창건했다.

정확한 창건의 사정은 전하지 않지만 왕사가 동화사를 창건한 후 산내 곳곳에 수행처를 마련하는 과정에서 묘봉암과 함께 이곳 중암암이 들어선 것으로 파악된다.

중암암은 가파른 산세와 험한 지형으로 수행자의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수행처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창건 이래 별다른 변천 사실은 전하지 않으나 암자 뒤편의 산중턱에 삼층석탑과 석등, 그리고 부도 등이 파손된 채 남아있다. 또 주위에는 건물지로 보이는 석축이 남아 있어 절의 유구한 역사를 말해준다.

1823년(순조 23) 태여(太如)대사가, 1834년(순조 34)에는 우일(宇一)과 유엽(有曄) 대사가 힘을 합쳐 중수했으며 지금의 가람은 최근에 중건된 것으로 법당과 산신각은 1958년에, 요사는 1980년대에 새로 지었다.

중암암은 돌구멍을 통해 절을 드나들게 되어 있고 현재는 사용을 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 제일 깊다는 해우소(解憂所)·건들바위·만년송·장군수·삼인암·극락굴·삼층석탑 등 볼거리도 많다.

특히 크고 아름다운 널따란 바위와 보검으로 내려친 듯이 쫙 갈라져 있는 여러 개의 바위가 먼 옛날 삼국을 호령하던 김유신 장군의 수도처일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영천향토사연구회원으로 지난 1990년 「골화성에 대하여-골화소국과 관련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던 이재수 박사는 “논란의 여지는 남아 있지만 김유신백석의 설화가 남아있는 신라의 삼산이었던 골화성[금강산성]의 존재로 보더라도 이곳이 중악석굴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하였다.

중악석굴은 1969년 5월 한국일보사 주관인 신라삼산오악조사단이 단석산으로 비정한 이래 거의 정설로 굳어졌으나 문경현 교수 등에 의해 중암암 일대라는 설이 제기됐다.

[모티프 분석]

「김유신과 중악석굴」의 주요 모티프는 ‘역사인물과 명당’이다. 바위에 나타난 흔적을 통해 삼국을 호령하던 김유신 장군의 수도처임을 유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김유신 장군의 위엄함과 삼국통일의 정당성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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