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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복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2315
한자 曺再福
이칭/별칭 취오(聚五)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인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7년 10월 8일연표보기 - 조재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12일연표보기 - 조재복 영천 지역의 3·1 만세 운동 주도
몰년 시기/일시 1953년 4월 14일연표보기 - 조재복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2년연표보기 - 조재복 대통령 표창
출생지 조재복 출생지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929 지도보기
묘소 조재복 묘소 -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
묘소 조재복 이장 전 묘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 산 44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본관 창녕

[정의]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영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영천 지역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가계]

조재복(曺再福)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취오(聚五)이다. 아버지 조계환(曺啓煥)과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2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7년 지금의 영천시 화북면 오산리에서 출생하여 1953년에 세상을 떠났다.

[활동 사항]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홍종현(洪鍾顯)·조병진(曺秉鎭)·조주생(曺周生) 등과 함께 영천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 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붉은 깃발과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였다.

4월 12일 영천 장날, 조재복은 동지들과 함께 장터로 나가 1천여 명의 장꾼이 모여들자 당시 창구동 소재 영천공립보통학교 앞에서 태극기와 ‘대한독립만세’라고 쓴 붉은 깃발을 흔들며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었다.

일경에 피체된 그는 같은 해 5월 8일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태(笞) 90대를 받고 불구의 몸으로 출옥하였고, 출옥 후에는 지역의 후학들에게 독립사상을 주입하는 등 민족의식 고취와 항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묘소]

조재복의 묘소는 원래 경북 영천시 오산리 산 44번지에 있었으나, 2012년 5월 대전국립묘지 애국지사묘역으로 이장하였다.

[상훈과 추모]

2012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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