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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방화 미수 사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530
한자 神社放火未遂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2년 9월 - 신사 방화 미수 사건, 박만선이 중국 장춘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재원 박동만으로부터 특수 임무를 받고 입국한 것이 계기가 됨.
발생|시작 시기/일시 1943년 5월연표보기 - 신사 방화 미수 사건 발발
발생|시작 장소 신사 방화 미수 - 경상북도 영천
성격 독립운동
관련 인물/단체 박만선

[정의]

1943년 5월 경상북도 경산 출신의 박만선(朴晩善)이 영천의 신사(神社)에 방화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

[개설]

서울중동중학교 재학 중이던 박만선은 1942년 3월 일제가 시행한 강제 징병에 반대하는 지하선전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춘 주재원(長春駐在員)인 박동만(朴東萬)을 만나 밀명을 받고 입국했다.

1943년 5월 박만선은 명령 받은 대로 경상북도 영천의 신사에 방화를 하려 했지만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역사적 배경]

일제 강점기,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비상 전시 체제 하에서 항일 독립 운동은 비합법적인 지하 운동으로 전환되었다. 국내에서는 민족 지사들이 일제를 비판·반대하여 독립 사상을 고취했고,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이 국내로 잠입·활동하는 형태였다.

특히 1940년 9월 중경(重慶)으로 이동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내에 대한 방송공작과 공작원 파견에 주력하였다. 그 중 국내에 파견된 공작원은 군자금 모집, 무기 탈취, 지하 거점 확보, 군사 시설 파괴, 항일 의식의 고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경과]

경산 출신으로 서울중동중학교에 재학하던 박만선은 일제의 강제적인 학도병 소집에 반대하여 지하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갔다. 1942년 9월 중국 길림성(吉林省) 장춘(長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재원 박동만과 접선하여 특수 임무를 받고 입국하였다.

박만선은 대구 출신의 박기수(朴基秀) 등 동지들을 포섭하여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경북 영천의 신사 방화와 대구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의 탄약고 폭파를 계획하였다.

[결과]

1944년 8월 23일 박만선은 경상북도 영천에서 동지들과 함께 대구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945년 5월 1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및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불경, 방화 예비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어 징역 7년형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박만선은 1945년 8월 20일 출옥하였다.

[의의와 평가]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가 더욱 가혹해지자 한민족의 항일 운동은 지하 활동의 형태로 변화했다. 이 사건은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우리 민족의 독립 사상을 고취하고 독립 의지를 표출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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