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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613
한자 生六臣李耕隱先生祭壇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원각길 45-4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경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13년연표보기 - 생육신 이경은 선생 제단 건립
이전 시기/일시 1971년 - 생육신 이경은 선생 제단 이전
문화재 지정 일시 1974년 12월 10일연표보기 - 생육신 이경은 선생 제단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
현 소재지 생육신 이경은 선생 제단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원각길 45-4[용산리 303]지도보기
성격 제단
양식 3량가|홑처마|소로수장|맞배기와집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벽진 이씨 경은파종중
관리자 벽진 이씨 경은파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4호

[정의]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경은 이맹전을 기리기 위해 지은 제단.

[개설]

생육신 이경은 선생 제단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을 추모하여 세운 건물로, 1786년(정조 10)에 임금의 명으로 지어졌다. 이맹전의 본관은 벽진(碧珍), 자는 백순(伯純), 호는 경은(耕隱), 병조 판서 이심지(李審之)의 아들로 경상북도 선산 출신이다.

[위치]

영천 시내 시청 오거리에서 포항·안강 방면 25번 국도를 타고 조교 삼거리까지 진행한 다음 임고면 방면으로 좌회전한 후 69번 지방도를 타고 5㎞ 정도 가면 임고면 소재지가 나온다. 임고면에서 자양면 방면으로 6㎞ 정도 더 가면 영천호를 만나게 되고 영천호를 우측에 두고 5.5㎞ 더 가면 자양면 소재지가 있는 성곡마을이 나온다.

성곡마을에서 2.5km가량을 더 진행하면 용산리 마을 초입에 이르고 마을로 들어선 다음 용산리 마을 쉼터까지 진행하면 좌측 편에 용계서원이 있는데 서원으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서원 우측 편으로 이경은 선생 부조묘이경은 선생 제단이 나온다.

[변천]

생육신 이경은 선생 제단은 1974년 10월에 착공하여 1980년 12월에 준공된 영천댐 공사로 노항동에 있던 용계서원을 옮기면서 부조묘(不祧廟)와 제단도 함께 옮겨와 지금은 용계서원과 같은 권역 내에 자리하게 되었다.

제단 앞에 세워진 안내 표지판의 설명으로 보면 1713년(숙종 39)에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되었으나 상량문에는 단기 4304년(1971)에 상량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 이는 제단의 초창은 1713년 후손들에 의해 노항동에 건립되었고, 이후 용산리로 이전한 것이 1971년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형태]

생육신 이경은 선생 제단은 정면 5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 기와집으로 기단은 다른 건물보다 위계를 높기 위해 정형하게 다듬은 장대석 기단을 세벌대로 높게 마련한 다음 원형 주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올렸다. 평면 구성은 제단 오른쪽에서부터 방 3칸을 나란히 배치한 다음 2칸은 대청을 덧붙여 구성했다.

구조는 3량 가로 하고 처마는 홑처마로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아두었다. 방과 마루방 전면과 후면에는 쪽마루를 설치하였고 전면에만 계자각 난간을 설치했는데 출입은 마루방 쪽 한칸에 난간을 설치하지 않은 곳으로 한다. 창호는 방 전면과 배면에는 쌍여닫이 띠살문을 달고 문선과 기둥 사이의 벽은 분벽 처리 했다. 아울러 대청 전면과 배면 창호도 1칸에는 사분합 굽널띠살문을, 나머지 한 칸에는 삼분합 굽널띠살문을 달았다.

대청 2칸은 통칸으로 처리하고 대청과 방 사이와 방과 방 사이에는 네짝 미닫이문을 달아 공간을 구분하고 있으나 유사시에는 미닫이문을 개방하여 넓은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현황]

생육신 이경은 선생 제단은 함께 이전해온 용계서원과 부조묘와 같은 권역에 있으며 최근에 지은 고직사가 주위에 있어 다른 곳에 비해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생육신 이경은 선생 제단은 197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54호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을 추모하여 세운 건물로 경상남도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과 경상북도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에서 제향 되고 있는 상태로, 이경은 선생 부조묘는 사당의 기능으로서는 상징적인 의미만이 남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용계서원에도 사당 건물이 따로 마련되어 있으나 현재까지 배향한 적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한 곳에 같은 기능을 가진 건물이 동시에 존재함으로써 기형적인 형태를 가지게 된 것이 아쉽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