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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100954
한자 昌寧成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북도 영천시
집필자 전민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조선 전기 - 성영준 출생
입향 시기/일시 1500년대 초 - 성영준 영천 입향 추정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521년 - 성영준 사망
본관 창녕 - 경상남도 창녕읍
입향지 신녕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읍
입향지 영천 - 경상북도 영천시
세거|집성지 창녕성씨 판서공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창녕성씨 판서공파 - 경상북도 영천시 화남면 선천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창녕성씨 판서공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창녕성씨 판서공파 -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도일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창녕성씨 평리공파 - 경상북도 영천시 도동
세거|집성지 창녕성씨 평리공파 - 경상북도 영천시 북안면 신리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창녕성씨 평리공파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오길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창녕성씨 평리공파 -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성천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창녕성씨 평리공파 - 경상북도 영천시 고경면 용전리 지도보기
성씨 시조 성인보(成仁輔)
입향 시조 성오원(成五元)|성영준(成永俊)

[정의]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하고 성오원(成五元)성영준(成永俊)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시의 세거 성씨.

[연원]

창녕 성씨(昌寧 成氏)는 고려 중엽 때 향직의 호장을 역임한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하고 있다. 고증할 사료가 없어 상계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문헌에 의하면 그는 명종 때 사람으로 고종 때 창성(創姓)한 것으로 전한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에서 서북쪽으로 15리쯤 떨어진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맥산(麥山)에 위치한 그의 묘(墓)에 대한 일화가 아래와 같이 전한다.

어느 해 정월 초 성인보는 송경에서 지방 관리의 하례(賀禮)모임이 있어 그곳에 갔다가 병사하자 그의 아들 성송국(成松國)이 아버지의 시신을 등에 업고 울며 천 리 길 고향 창녕으로 내려오다가 현풍현 청산원(靑山院)에 이르러 해가 기울었다. 지친 몸으로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깨어보니 아침이 되었고,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는데 시신의 주위에 호랑이 발자국이 찍혀져 있고 그 발자국이 앞산으로 향했는지라 발자국을 따라 쫓아가 보니 지금의 묘 자리에 이르러 그쳐 있었다. 신통한 것은 온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여 있었는데도 묘 자리 넓이만큼은 눈이 녹아 있어 묘를 쓰게 되었으니 바로 창녕 맥산이다.

현재 시조공 묘소 앞의 단갈(短碣)은 외손인 이파(李坡)가 창녕현감으로 있을 때 세웠으며, 창녕군 대지면 효정리에 시조공의 신도비가 있는데 비문은 후손인 경상도 관찰사 성기운(成岐運)이 찬하고 곽전(郭沺)이 썼다.

그 후 창녕 성씨는 시조의 손자 성공필(成公弼)과 성한필(成漢弼)대에서 크게 2계통으로 갈라졌고, 6세에 내려와 기(紀)를 파조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를 포함하여 13파로 분파되어 세계를 이어 왔다. 신녕 고을[영천시 신녕면]에는 판서공파가 세거하고 있으며, 영천 고을에는 평리공파가 세거하고 있다.

[입향 경위]

창녕 성씨로 처음 우리 고장에 입향한 사람은 신녕 고을에 입향한 성오원(成五元)과 영천 고을에 입향한 성영준(成永俊)을 꼽을 수 있다. 성영준은 그의 종숙부인 성한(成翰)과 더불어 영천으로 입향하였다고 하는데, 성한의 후손이 영천에 세거하지 않는 관계로 영천 입향조를 성영준으로 기록한다.

이들이 언제 무슨 이유로 영천으로 이거하여 살았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대체로 1500년대 초에 영천으로 이거한 것으로 판단되며, 어지러운 조정을 등지고 은둔하여 조용히 살고자 이곳에 정착한 것으로 여겨진다. 영천을 선택한 이유는 아마도 처가가 있는 곳에 정착하고자 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성영준의 부인은 용궁 전씨(龍宮全氏)로, 장인 전영창(全永昌) 역시 1472년 처가가 있는 이곳 영천으로 은둔한 사람이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성영준의 사위인 이방(李芳) 역시 이곳 영천으로 입향을 하니 대체로 처가를 따라 왔을 것이라는 추측이 크게 빗나가지는 않을 것이다.

성오원(成五元)은 생졸연대가 불분명하며 자는 응경(應卿)으로 충순위(忠順衛)를 지내고 이곳 신녕 땅으로 은거를 하였다.

[현황]

성오원의 후손은 『화산지(花山誌)』를, 성영준의 후손은 『영양지(永陽誌)』를 중심으로 하여 입향 이후 인물을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화산지』를 살펴보면 성덕룡(成德龍)과 그의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인 두 아들 성훈(成勳)성적(成績)이 나온다. 『영양지』에는 문과(文科)로 예조판서(禮曹判書)인 성한(成翰), 입향조인 성영준(成永俊), 현감(縣監) 성확(成確), 훈도(訓導) 성렬(成烈), 생원(生員) 성침(成忱), 습독(習讀) 성익수(成益壽), 문행이 뛰어난 성립(成立), 찰방(察訪) 성이직(成以直), 문행이 뛰어난 성이량(成以諒), 진사(進士) 성철(成 澈에서 水 대신 日변), 진사(進士) 성하문(成夏文), 문행이 뛰어난 성하구(成夏耈)과 성효조(成孝祖), 문과(文科)로 군수(郡守)인 성헌조(成憲祖), 문행이 뛰어난 성후원(成後元), 문과(文科)로 병조정랑(兵曹正郞)인 성해룡(成海龍), 문행이 뛰어난 성술조(成述祖), 습독(習讀) 성도제(成道濟), 문행이 뛰어난 성두권(成斗權), 문행이 뛰어난 성진운(成震運), 문행이 뛰어난 성길운(成吉運), 문행이 뛰어난 성두운(成斗運), 수직(壽職) 통정대부(通政大夫) 성종렴(成宗濂), 도사(都事) 성종대(成宗大), 부사과(副司果) 성재필(成在弼), 도사(都事) 성학진(成鶴鎭), 문행이 뛰어난 성이진(成怡鎭)과 성유진(成裕鎭), 성규진(成奎鎭), 성대흥(成大興), 성낙영(成樂英), 성문호(成文鎬) 등 32명에 이른다.

창녕 성씨는 전국에 고루 분포하여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집성촌을 이루어 사는 곳은 본향인 창녕이 가장 많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을 비롯하여 창녕군 대지면·고암면·이방면 등지에 집성촌이 있으며,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과 경상북도 상주시 내서면 및 모서면, 충청북도 음성군 원남면 등지에 집성을 이루어 살고 있다.

영천 지역에는 화남면 대천리선천리, 자양면 충효리도일리창녕 성씨 맏집인 판서공파가 집성을 이루고, 영천시 도동북안면 신리리, 대창면 오길리, 금호읍 성천리, 고경면 용전리 등지에 평리공파의 후손들이 세거하여 살고 있다.

[관련 유적]

성송국(成松國)을 주향으로 판서를 지낸 성기(成紀) 그리고 임진왜란 때 두 아들을 의병으로 참전시킨 참의 성덕룡(成德龍)을 배향하는 대천서원(大川書院)과 성덕룡(成德龍)의 망학정(望鶴亭), 성적(成績)의 모와정(慕窩亭), 성립(成立)의 모암정사(慕庵精舍), 성이직(成以直)만천정사(晩川精舍), 성하구(成夏耈)죽오정(竹塢亭)이 있다.

선대의 묘재로는 화산재(花山齋)·영모재(永慕齋)·두여재(杜余齋)·추모재(追慕齋)가 있다. 또한 후학을 양성하던 서당인 단양재(端陽齋)성훈(成勳) 기적비 및 유학성학진수세유공비(幼學成鶴鎭水稅有功碑)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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